
고려대 법학, 사법연수원 39기, 법무법인 태평양 공정거래그룹 변호사 사진 법무법인 태평양
공공기관 A가 건설 업체 B에 공사를 발주했다고 치자. 누가 갑(甲)의 위치에 있을까. 언뜻 보기엔 공사를 맡기는 A가 갑인 것 같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A가 전체 시장에서 발주자로서 차지하는 비중은 1%가 안 된다. 반면 B가 건설 시장에서 공사를 수주하는 비중은 10% 가까이 된다. A의 연 매출은 2조원, B는 10조원 이상이다. A는 40%가량을 B와의 거래에 의존하지만, B는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기관과 건설 계약을 맺는다.
이런 상황에서 A가 B에 ‘갑질’을 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오히려 을(乙)의 위치로 생각할 것이다.
법원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서울고등법원은 2016년 9월 경기도시공사(이하 도시공사)가 건설 업체들에 거래상 지위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공사가 갑의 위치에 있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도시공사는 건설 계약을 맺은 9개 업체에 대해 추가로 발생한 공사 비용을 법과 일부 다르게 책정해 문제가 됐었다. 공정위는 이를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로 보고 과징금 처분을 했고, 도시공사는 이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도시공사를 대리한 박성진(사법연수원 39기)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이 판단을 끌어냈다. 지방 공사의 공사비 책정 행위가 거래상 지위 남용이라는 불리한 판례도 있었다. 박 변호사는 그럼에도 법정에서 거래상 지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주장했다. 그는 “갑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려면 계약 자체만을 보기보다 도시공사와 업체의 서로에 대한 거래 의존도, 이들이 건설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시장 상황 등이 고려돼야 함을 주장했다”고 했다. 법원도 그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거래 상대방인 건설 업체가 원고(도시공사)에 비해 전체적 사업 능력이 우월하고 거래 상대방을 바꿀 충분한 기회가 있으며, 실제 원고에 대한 거래 의존도도 낮아 원고에게 거래상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갑(甲)을 판단할 때 ‘외부 옵션’도 고려해야
올해로 11년 차인 박 변호사는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다. 태평양 공정거래 그룹에서 기업을 대리해 공정위 조사에 대응하고,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 소송을 진행하는 역할을 한다. 공정위 조사 이전에 공정위 소관 법령에 관해 자문도 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공정거래 일에 일찍이 관심을 두게 됐다. 법무관 시절 고려대 대학원에서 이황 교수 지도 아래 공정거래법을 전공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는 “거래상 지위, 경쟁 제한성, 부당성 같은 공정거래 분야의 여러 개념이 ‘모호하다’고 느꼈다”며 “모호한 만큼 해석의 여지도 많다 보니 변호사의 역할이 중요하겠다고 판단해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전했다.
박 변호사는 특히 거래상 지위에 관심이 깊다. 거래상 ‘갑의 위치’라고 판단될 경우 규제 대상이 되므로 기업 입장에선 이를 예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아직 이 기준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갑이 돼서 규제를 받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거래를 포기하게 되고, 이에 따라 효율적인 거래가 줄어들면 소비자가 누릴 혜택 역시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도시공사 사건 이후 애플코리아 등 여러 기업의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 관련 사건을 맡아온 박 변호사는 나름의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외부 옵션’에 따라서 누가 갑인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래 상대방이 ‘나’ 말고도 여러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나’를 골랐다면, 내가 우월해서가 아니라 나를 고르는 게 이득인 탓이다. 이 경우 오로지 본인의 득실에 따라 ‘나’를 고른 상대방이 을이 될 리는 없다. 박 변호사는 공정위도 이런 식의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는 유통법에도 적용된다. 현행 대규모유통업법은 ‘유통 업체는 갑, 납품 업체는 을’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에 박 변호사는 “기업 규모나 외부 옵션, 거래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납품 업체가 명백히 ‘갑’임에도 ‘유통 업자=갑’이라는 기준 때문에 유통 업체체 협상력이 제한되고, 그 결과 소비자가 피해를 보기도 한다”며 “현실에 맞게 개별 사건마다 규제에 대한 판단 기준을 달리할 수 있도록 관련 고시라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변호사는 이 같은 의견을 논문으로도 냈다. 그가 쓴 ‘거래상 지위 판단 기준’에 관한 논문은 공정위 실무진에게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최근 주요 거래상 지위 남용 사건을 처리한 공정위 담당자로부터 논문이 큰 도움이 됐다는 인사를 들었다”며 “앞으로도 의뢰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고민한 결과가 공정거래 분야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남다른 ‘피티’에 제강사 러브콜 잇따라
법조계 안팎에서는 박 변호사를 ‘피티(PT)의 달인’으로 부른다. 그는 남다른 발표력으로 현재 7대 제강사 중 6곳 사건을 대리하고 있다. 한 로펌에서 업계를 좌우하는 여러 기업의 사건을 동시에 맡는 것은 드물다. 박 변호사의 피티 덕이다.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한 건 ‘관수 철근 입찰 담합 사건’에 대한 공정위 심의가 열릴 때였다. 이 사건은 공정위가 철근 입찰 과정에서 담합을 한 7개 제강사를 심의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공정위는 제강사들이 조달청이 정기 발주한 철근 연간 단가 계약 입찰 과정에서 미리 낙찰 물량을 배분하고 투찰 가격을 합의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박 변호사는 환영철강공업을 대리해 공정위 심사보고서에 대한 기업 측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관수 철근 시장은 애초에 경쟁 유인이 없는 시장이라는 점을 그래픽으로 설명했다. 낙찰자가 여러 명이므로 물량 확보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간단한 그림으로 도식화했다. 그는 조달청의 ‘최저가 입찰제’를 지적할 때도 그림을 사용했다.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회사의 낙찰가에 철근 계약 단가를 맞추도록 한 조달청의 행위가 일종의 ‘갑질’이라는 점을 보기 쉽게 설명했다.
심의가 끝난 후 자리에 있던 제강사 임직원들은 그의 피티를 칭찬했다. 자신들이 처해있던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줬기 때문이다. 이후 제강사 6곳은 태평양에 이번 사건 손해배상 소송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7대 제강사 모두 박 변호사가 주도하여 준비한 ‘관수 철근 입찰 담합 효과에 대한 경제분석’ 보고서를 이 사건 형사 사건 변론에서 적극 활용했다.
박 변호사는 “한때 롤모델을 스티브 잡스로 삼았다”고 했다. 그는 “공정위 심의에서 변호사 피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어떤 피티가 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 오랜시간 고민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복잡한 사건을 설명해야 할 때는 피티에 실을 영상을 생각해 외부에 제작 의뢰를 맡기기도 한다”며 “짧은 시간에 사건을 쉽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공정거래 변호사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