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술 마시러 올래요?”
미국인 대상의 스타트업 전문 미디어를 만들기 위해 2022년 5월 무작정 실리콘밸리로 향했을 때였다. 한국에서 구독자 58만 명,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전문 미디어를 만든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름 모를 한국인이 만들 새로운 매체의 인터뷰에 응해주는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는 없었다. 낙담하여 술에 취해 샌프란시스코 밤길을 걷던 중에 페이스북으로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한국인이 창업한 실리콘밸리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 센드버드 김동신 대표가 보낸 메시지였다. ‘대단히 성공하신 분이 갑자기 술이라니!’ 무슨 일일까 싶어 당장 우버를 잡아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이날 그는 몇 년간 내가 꾸준히 실리콘밸리의 문을 두드리는 걸 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며 세계 최고의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의 수장 마이클 세이벨(Michael Seibel)을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김 대표는 ‘Intro: Michael(YC)<> Taeyong(eo)’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마이클을 서로 소개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Hi Michael’이라며 얼마나 내가 그의 팬인지, 왜 그와 인터뷰하고 싶은지 장문의 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얼마 뒤 김 대표가 “마이클과 이야기가 잘되고 있냐”고 묻길래 “바쁜지 답장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미국에서 성공한 유명한 사람이 답장하지 않는 건 예의 없는 게 아니다. 거꾸로 회신이 올 때까지 메일을 보내는 것도 예의 없는 건 아니다. 계속 문을 두드려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이틀에 한 번꼴로 마이클에게 메일을 보냈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마이클의 인터뷰 영상은 조회 수 46만 회를 기록하며 글로벌 미디어로서 폭발적인 성장의 신호탄이 됐다. 이후 이 영상을 계기로 EO는 스노플레이크, 필립모리스, 노션 등에 이르기까지 미국 최고의 기업인과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인사이트를 조명하는 글로벌 미디어로 성장하게 됐다.
한국이 권력 기반의 인맥 사회라면 미국은 신용 기반의 인맥 사회다. 미국에서 대기업 오너가 친인척에게 조직의 주요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적지만, 누구와 아느냐에 따라 어려운 일도 쉽게 풀리고 채용이나 투자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미국에서 인도인이 회사의 특정 부서 임원이 되면 그 조직 모두가 인도인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같은 문화권의 사람끼리 일할 때 성과를 더 잘 낸다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의 지인을 채용할 때, 채용하는 사람도 본인의 신용을 걸어야 한다. 그가 조직 내에서 일을 못하면 나의 신용이 깎이고 소개해 준 사람의 신용까지 깎인다. 그렇기 때문에 소개를 통해 유명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면, 반드시 그 사람을 만족시켜야 소개해 준 사람과의 인연도 지킬 수 있고 더 좋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문이 열린다.
신용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미국 인맥 사회에 들어가고 싶다면 세계시장에서 일하는 한국인과 연을 맺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랜 시간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 김 대표도 지난 6년을 지켜본 끝에 내게 하이 프로필 인맥을 소개해 줬다. 기회가 주어졌다면 모든 것을 쏟아부어 기회를 준 사람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때 비로소 미국에서 신용을 쌓을 수 있고 ‘이너서클’에 들어갈 수 있다.
과연 내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꼭 글로벌 진출을 해야 할까 의심이 들 때 김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원래 글로벌인데 당신이 한국에 있는 것이다. 미국에는 3억 명이 있고 영어 쓰는 사람은 수십억 명이며 한국 인구는 5000만 명이다. 자,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의 신용을 착실히 쌓기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