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uilding Trust(신뢰 재구축)”
예멘 후티 반군의 서방 국가 상선 공격,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의 3연속 집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쟁 위협 등 새해 연초부터 높아지고 있는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1월 15~19일(이하 현지시각)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제54차 세계경제포럼(WEF·이하 다보스포럼)은 2024년의 주제로 ‘신뢰 기반을 다시 만들자’는 제안을 내놨다.
글로벌 안보 질서, 세계경제 통합, 탈탄소화, 성 평등, 빈곤 퇴치 등 다보스포럼이 세계경제의 지향점으로 제시한 가치들이 지난 수년 동안 후퇴한 것에 대한 위기감을 ‘신뢰 재구축’이라는 주제로 나타냈다는 반응이 나왔다.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현안에 대해 ‘각자도생’하기보다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다시 신뢰를 쌓아나가자는 취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승 아이오와 코커스에 촉각
그러나 정작 회의 분위기는 신뢰 기반 붕괴에 대한 우려가 더욱 강하게 묻어났다고 한다.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15일 다보스포럼 개막식에 참가한 각국의 유력인사들이 회의장과 뒷방에 모여 이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대선 후보를 뽑는 첫 경선인 미국 공화당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50% 이상 득표하며 아이오와주 코커스 역사상 최대 득표율 차이로 승리했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트럼프 재선에 대한 우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다보스포럼을 앞둔 최근 프랑스 TV와 인터뷰에서 “임기 4년 동안 트럼프의 행적을 감안하면 재선은 분명한 위협”이라면서 “관세 인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발언, 기후변화 억제에 대한 반대 등은 미국의 이익이 유럽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지정학적 리스크 주요 의제로 부각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서방 진영 지도자들은 변함없는 우크라이나 지원 방침을 재확인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16일 특별 연설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계속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했다. 패널 토론에 참석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도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무기를 공급해야 한다”면서 “믿을 만한 군사 지원이 담보될수록 외교적으로도 (종전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특별 연설자로 연단에 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동맹들은 우크라이나에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가 이제 막 흑해에서 우위를 확보했듯이 제공권에서도 우위를 점해야만 한다”고 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의 국민 그리고 여러분의 투자만이 강력한 경제를 건설할 수 있다”면서 “우리 경제를 강화하는 것이 곧 여러분의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전 이후 2만5000명가량 희생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예멘 후티 반군의 민간 선박 공격 등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는 토론 세션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군의 교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자 지구에서 전쟁을 멈춰야 중동 지역으로의 확전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아라비아 외무 장관은 패널 토론에서 가자 지구 전쟁 등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의향을 나타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해결 후 포괄적인 합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틀림없이(certainly)’라고 긍정했다.
중동 위기 등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전한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특별 연설도 이목을 끌었다.
오후 세션 특별 연설에 나선 설리번 보좌관은 미군과 영국군이 최근 후티 반군을 타격했지만, 미국은 중동의 긴장 완화를 추구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해서도 전쟁 지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상·하원의 초당적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다보스포럼 현장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중동 상황뿐만 아니라 북한 같은 다른 위협에 대해 걱정한다”고 말했다.
세계 경제학자 56%, 성장 동력 약화 우려
다보스포럼에 모인 재계 인사들도 전쟁과 선거 등으로 높아진 세계적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표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지정학적으로 올해는 격동의 해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JP모건체이스의 글로벌 투자은행(IB) 사업 부문 공동 수장인 비스와스 라가반도 “지정학이 이처럼 중요하고 거의 결정적 변수이던 때를 본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자문 업체 유라시아그룹의 이안 브레머 회장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집단적 지지를 표했던 2023년과 달리 이번 포럼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와 대선 결과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전문가들의 경제 전망에서도 확인된다. 15일 다보스포럼 사무국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경제학자 56%는 올해 세계경제 성장 동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보고서는 2023년 11~12월 각국의 수석 경제학자 3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다. 세계경제 성장력이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더 강해질 것이란 응답은 각각 20%, 23%에 그쳤다. 특히 경제학자 77%는 올해 유럽 경제가 ‘매우 약하거나 약한 성장을 보일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의 경우 ‘중간 수준’ 이상으로 성장할 거란 응답이 과반(56%)이었다.
암울한 경제 전망의 원인으로는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 격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같은 지정학적 갈등이 제시됐다. 경제학자의 70%는 “지정학적 갈등으로 글로벌 경제 권역 분열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인공지능(AI) 기술에 따른 경제 생산성 향상 전망에선 ‘앞으로 5년 안에 경제 생산성을 높인다’는 예측은 고소득 국가에서 94%, 저소득 국가에서 53%였다.
다보스 간 재계 3세들
탈탄소 등 ESG 비전 제시
1월 15~19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한국의 재계 3세들이 탈탄소 비전을 제시하는 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역량을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다보스포럼 연차총회 세션에서 ‘무탄소 추진 가스 운반선’을 제시했다. 코로나19로 행사가 취소된 2021년을 제외하고 2010년부터 13년 연속 참석한 김 부회장은 올해 처음으로 연차 총회 연설자로 나섰다. 이 자리에서 태양광·수소·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에서 해양으로 탈탄소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한화의 새로운 비전으로 무탄소 추진 가스 운반선 플랜을 공개했다.
2023년에 이어 2년 연속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올해는 ‘공급·운송 산업 협의체’와 ‘에너지산업 협의체’에 참가했다. 최근 폐막한 CES 2024 기조연설에서 “해상에서 육상까지 전 지구를 아우르는 수소 에너지 생태계를 구축하고, 미래를 위한 탈탄소 글로벌 에너지 가치 사슬을 마련하겠다”고 언급한 정 부회장은 이번 다보스포럼에서도 탈탄소 추진 및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정 부회장은 공급·운송 산업 협의체에서 로버트 머스크 우글라(Robert Maersk Uggla) 머스크 의장과 만나 친환경 선박에 대한 협력 관계를 공고히 했다. 에너지산업 협의체에서는 셸, 토털에너지스, 페트로나스 등 글로벌 30여 개 에너지 기업과 탈탄소를 위한 상호 협력 방안과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합의된 온실가스 감축안의 실질적인 이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