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완공된 광화문 앞의 월대. 역사적 의미가 불확실하거나 희박하고 문화적 가치도 경미한 이 구조물을 도심 교통 혼잡까지 감수하면서 많은 예산을 들여 설치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사진 뉴스1
2023년 10월 완공된 광화문 앞의 월대. 역사적 의미가 불확실하거나 희박하고 문화적 가치도 경미한 이 구조물을 도심 교통 혼잡까지 감수하면서 많은 예산을 들여 설치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사진 뉴스1

오대십국(五代十國) 때의 남당(南唐·937~975)은 중국 동남부의 꽤 넓은 지역을 차지해 3대에 걸쳐 번성했으나 결국 송(宋)에 합병됐다. 그 2대 군주 이경(李璟·916~961)과 3대 이욱(李煜·937~978) 부자는 후세에 각각 ‘중주(中主)’와 ‘후주(後主)’로 불리며 사인(詞人)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 이욱은 역대 최고 작가로 대접받는다. 그는 문인으로서 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경륜(經綸)의 재목은 아니었다. 이에 청(淸) 중기의 곽린(郭麐)은 ‘남당잡영(南唐雜詠)’에서 “재인이 됐다면 참으로 세상에 짝이 없을 터인데, 가엽게도 박한 운명에 군왕이 됐구나(作個才子眞絕代, 可憐薄命作君王)”라며 동정을 표했다.

이욱은 포로가 된 뒤 변경(汴京)으로 끌려가 3년간의 연금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에 지은 시가들은 오랫동안 세인의 심금을 울려왔다. 어느 늦은 봄날 그는 고국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나그네의 서러움을 ‘랑도사(浪淘沙)’라는 곡조로 토로했다.

“발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봄기운도 시들해졌다. 비단 이불로 새벽 추위 견딜 수 없어. 꿈속에선 나그네 몸인 줄 모르고, 잠시나마 즐거움을 탐했다(簾外雨潺潺. 春意闌珊. 羅衾不耐五更寒. 夢裡不知身是客, 一晌貪歡). 혼자서 난간에 기대지 말지니라. 끝없는 옛 강산이 저 멀리 있으니. 떠날 때는 쉬웠지만 다시 보기 어려워. 흐르는 물에 꽃이 떨어지고 봄은 가나니, 하늘 위와 세상 사이처럼 먼 곳으로(獨自莫憑欄. 無限江山. 別時容易見時難. 流水落花春去也, 天上人間).”

여기서 ‘막(莫)’을 ‘모(暮)’로 보아 ‘해 질 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의 용법에 맞지 않고 의미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난간에 기대어 고향 쪽을 바라보면 더욱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애써 외면한다고 풀이해야 자연스럽다. ‘천상인간’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도 나온다. “다만 마음을 금비녀처럼 굳게 한다면, 하늘 위와 세상 사이처럼 떨어져도 만날 터이니(但令心似金鈿堅, 天上人間會相見)”라는 구절이다. 그에 앞서 북제(北齊)의 고앙(高昂)이 지은 시에 “하늘 위와 인간 세상에서 비할 자가 없다(天上人間無可比)”는 말이 보인다.

이욱의 대표작은 ‘우미인(虞美人)’이다. 이를 지은 뒤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흔히 ‘절명사(絕命詞)’라고 칭한다. 작품의 내용과 감정은 ‘랑도사’와 유사하다.

“봄꽃 가을 달은 어느 때나 다하려나. 지난 일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작은 누각엔 어젯밤 또 동쪽 바람이 불어왔다네. 달 밝은 밤에 고국 쪽으로 차마 고개 돌릴 수 없어라(春花秋月何時了. 往事知多少. 小樓昨夜又東風. 故國不堪回首月明中). 아로새겨진 난간과 옥돌 계단은 아직도 그대로 있겠지. 지난날 붉던 이 내 얼굴만이 변했구나. 그대에게 얼마나 많은 근심이 있을 수 있는지 묻노니. 마치 온 강의 봄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으리라(雕欄玉砌應猶在. 只是朱顏改. 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망국 군주로서 아름다운 봄꽃과 가을 달을 보기도 괴로웠다. 궁궐에서 비빈(妃嬪)들과 그 경치를 감상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고향이 있는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만 맞아도 고향이 더욱 그리워졌다. 그래서 그 젊은 얼굴은 빨리 시들고 한은 끝없이 쌓여갔다.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송의 망국 군주 휘종(徽宗) 조길(趙佶·1082~1135)의 경우도 이욱과 비슷하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경지에 이른 그였으나 나라를 망쳤다. 그의 시와 사가 20수가량 남아 있다. 그림과 글씨에서는 더욱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특히 ‘수금체(瘦金體)’라고 불리는 글씨는 고금을 통틀어 독보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여진족이 침공해 오자 아들 흠종(欽宗)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불과 1년 만에 왕조가 멸망해 아들과 함께 북방으로 끌려갔다. 낯선 땅에서 그 참담한 심경을 ‘재북제벽(在北題壁·북쪽 땅에서 벽에 적다)’이라는 칠언절구로 남겼다.

“밤새도록 부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부서진 문짝, 스산하고 외로운 객사에 희미한 등불 하나. 고향 쪽으로 고개 돌리니 삼천리나 먼 길, 눈길 끊이는 하늘 남쪽엔 기러기도 날지 않누나(徹夜西風撼破扉, 蕭條孤館一燈微. 家山回首三千里, 目斷天南無雁飛).”

그는 적국에서 온갖 고초와 모욕을 겪으며 8년 동안 살았다. 마지막에는 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 옮겨졌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고국 땅과 영화롭던 제왕 시절을 그리워하며 여러 편의 시가를 지었다. 그중에서 ‘안아미(眼兒媚)’라는 곡조의 사가 읽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일찍이 번화했던 옛 도성을 그리워하노니, 만 리 땅이 제왕의 집이었다. 아름다운 숲과 구슬 전각에 아침은 관현악 소리 시끄럽고 저녁은 생황과 비파가 늘어섰다(玉京曾憶昔繁華, 萬里帝王家. 瓊林玉殿, 朝喧弦管, 暮列笙琶). 꽃 같은 성에 사람이 떠나 이제는 쓸쓸할 터인데, 봄 꿈은 오랑캐 땅 모래에 감싸여 있다. 고향은 어느 쪽인지, ‘매화락’ 부는 피리 소리 어찌 차마 다 듣겠나(花城人去今蕭索, 春夢繞胡沙. 家山何處, 忍聽羌笛, 吹徹梅花).” ‘매화락(梅花落)’은 피리 곡조다.

남북조시대 진(陳)의 후주 진숙보(陳叔寶·553~604)도 여러 편의 시가를 남겼다. 어느 날 그는 아리따운 궁녀의 모습을 보며 이를 악부시(樂府詩)로 지어 불렀다. 후대에 ‘망국지음(亡國之音)’이란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붙은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다.

“높은 누각 마주한 아름다운 집 향긋한 숲에서 걸어오는 여인, 새롭게 단장한 고운 자질은 본래 성을 기울일 만하다. 문에 비치는 귀여운 모습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휘장 나와 예쁜 자태 띠고 웃으며 맞이한다. 요염한 미희의 얼굴이 이슬 머금은 꽃 같고, 옥으로 빚은 나무처럼 빛을 흘려 뒤뜰을 비춘다. 꽃이 피고 꽃이 져 오래 가지는 못하리니, 땅에 가득 떨어진 붉은 꽃잎 적막함 속으로 돌아가리라(麗宇芳林對高閣, 新裝艷質本傾城. 映戶凝嬌乍不進, 出帷含態笑相迎. 妖姬臉似花含露, 玉樹流光照後庭. 花開花落不長久, 落紅滿地歸寂中).”

시가로서는 아름다우나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처럼 궁녀들과 어울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그는 북쪽에서 쳐내려온 수(隋)의 대군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총비(寵妃) 장려화(張麗華)와 함께 포로가 됐다. 장려화는 ‘요사스러운 여인이 나라를 그르쳤다(禍水誤國)’는 죄명으로 참살되고 그는 북쪽으로 끌려가 5년을 더 살았다.

이와 관련해 만당(晩唐)의 두목(杜牧)은 ‘박진회(泊秦淮)’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개가 찬물 위에 자욱하고 달빛은 모래 위에 가득할 때, 밤들어 진회에 정박하니 술집이 가깝다. 기녀는 망국의 한을 모르는 듯, 강 건너에서 아직도 ‘후정화’를 부른다(煙籠寒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家.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

장려화의 경우처럼 망국의 허물을 여인에게 씌우는 예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하(夏)와 은(殷)의 걸(桀)과 주(紂)가 각각 매희(妹喜)와 달기(妲己) 때문에 망국 군주가 됐고, 주(周)의 유왕(幽王)과 당의 현종(玄宗)이 각각 포사(褒姒)와 양귀비(楊貴妃)로 인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는 식이다. 이에 대해 후촉(後蜀·934~966) 후주 맹창(孟昶)의 총비 화예부인(花蘂夫人)이 나라가 망한 뒤 송의 도성으로 끌려가 황제 조광윤(趙匡胤) 앞에서 ‘술국망시(述國亡詩)’라는 시로 비꼬았다.

“군왕의 성 위에 항복의 기가 세워질 때, 깊은 궁중에 있던 소첩이 어찌 알았겠나이까. 십사만 군사가 모두 갑옷 벗었는데, 어이하여 사나이는 하나도 없었나요(君王城上豎降旗, 妾在深宮那得知. 十四萬人齊解甲, 寧無一個是男兒)?”

근년 들어 당국에서는 난데없이 망국 군주 기념사업에 열을 올렸다. 광화문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월대(月臺)’와 덕수궁 돌담 옆의 ‘고종의 길’이 그 예다. 이에 대해 뜻있는 인사들의 비판이 많다. 그중 한 기자는 ‘매국노 고종’이라는 책도 내어 화제가 되고 있다. 저자는 망국을 재촉한 고종의 비행들을 낱낱이 열거, 그를 ‘만악의 근원’이라고 정리한다. 그런데도 대중은 오랫동안 이른바 ‘을사오적’만을 매국노로 매도해 왔다. 역대의 망국 군주들이 여인으로 인해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를 믿는 것과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