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장벽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첫 인공지능(AI) 폰 ‘갤럭시 S24’의 통역 기능은 1월 17일(이하 현지시각) 데뷔 무대에서 바로 합격점을 받았다. 한국 소설과 에세이, 웹툰과 웹소설이 K콘텐츠 열풍과 AI 번역 도구 발달에 힘입어 해외에 번역, 출간되는 사례도 흔하다.
이 도도한 흐름 속에 제대로 된 기회를 발견하려면 언어 장벽의 와해 경로와 새 소통 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앞으로 통역사는 살아남을 수 있나’는 질문도 지겹도록 던져야 할 것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프로페셔널(전문가)이 새롭게 정의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런 질문에 답할 사람으로 떠올린 사람이 통·번역 스타트업 플리토(Flitto) 공동 창업자 이정수 대표다. 이 대표는 쿠웨이트에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미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2012년 번역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언어 장벽을 넘기 위한 도전과 시행착오를 몸소 겪은 셈이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 박람회 CES발 AI 훈풍으로 AI 테마주 주가도 뛰었다. 플리토의 경우 1월 25일 기준 최근 3개월 주가 상승률이 137%에 달했다. 플리토는 2019년 ‘사업 모델 특례 상장 1호’로 코스닥에 입성했다.
이 대표는 1월 12일 인터뷰에서 “유사 이래 인간이 언어를 정복한 적은 없었다. AI 등장은 바퀴 발명에 버금갈 정도로 수많은 기회를 열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AI 시대에도 인간의 역할은 있다. 나는 기계와 인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하이브리드’주의자”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비전 번역 시대 올 것
올해도 AI 열풍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언어 분야의 흐름을 감히 예측하자면, 멀티모달(다양한 입력·가령, 텍스트, 음성, 이미지, 비디오 등) 중에서도 비전(vision·시각)을 활용한 서비스 사례들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10여 년 전 구글 글라스가 나왔을 때 실제로 착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구글은 곧 사업을 접었다. 올해부터는 다를 것이다. 주변의 얼리 어댑터들이 글라스를 쓰고 돌아다닐 가능성이 크다. 2월 2일 애플이 출시하는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 프로(Vision Pro)’가 그 신호탄이 될 것이다. LG전자도 퀄컴과 손잡고 스마트 글라스를 내놓는다.
생성 AI(Generative AI) 기반 기술인 거대 언어 모델(LLM)과 비전 컴퓨팅이 만나는 세상을 생각해 보자. 글라스를 착용한 사람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별 불편함 없이 간판을 읽게 되고 통역사도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더 정확하게 통역을 하게 될 것이다.
플리토의 ‘플레이스(place)’는 평양냉면, 육개장 등 식당 메뉴판을 원하는 언어로 번역해 주는 서비스다. 국내 3대 백화점에 납품했고 대만, 베트남, 이탈리아 등 29여 개국에서도 서비스될 정도로 인기다. 지금,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카메라 앱으로 메뉴판의 QR코드를 찍어야 한다. 앞으로는 글라스만 착용하면 원하는 언어로 메뉴를 바로 읽어 내려가게 될 것이다.”
‘온 디바이스(On Device) AI’도 기술 트렌드로 떠올랐다. AI를 탑재한 삼성전자의 ‘갤럭시 S24’가 역대 최다 사전 판매량을 기록할 전망이다.
“구글 번역 엔진이나 딥엘 번역 엔진은 범용 엔진이다. 온 디바이스 번역 엔진은 기기에 저장돼 있는 메시지 등 나의 정보와 특성을 반영해 번역해 줄 수 있다. 내 말투를 따라 하는 번역도 가능하다. 개인 단말기에는 개개인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전 컴퓨팅과 온 디바이스 AI가 만나면, ‘평소 카드 기록과 평점 기록을 고려할 때, 바로 50m 앞에 보이는 칼국숫집을 당신이 좋아할 확률은 80%야’ 식의 추천 서비스도 가능해진다.”
동시통역이 곳곳에 스며든다
AI 기반 번역의 또 다른 흐름은.
“소수 기업이나 기관에서만 가능했던 동시통역이 앞으로는 곳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에 있는 별마당도서관을 가보라. 하루에 한두 번씩 북 콘서트를 하는데 디스플레이를 통해 영어 자막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지난해 말부터 각종 콘퍼런스에서 자막을 통해 동시통역을 해주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다. 과거 국제 콘퍼런스장에서 통역 부스를 만들고 통역가를 초청하면 수백만원이 들었는데, AI의 발달로 동시통역 비용도 크게 낮아지고 있다.”
국제회의나 콘퍼런스 풍경도 많이 달라지겠다.
“(플리토의 실시간 통·번역 서비스 ‘라이브 트랜스레이션’을 시연하며) 카메라 앱으로 QR 코드를 스캔하면 가상 회의 룸에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언어로 발표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이 서비스에는 발표자가 하는 말을 기계(컴퓨터)가 받아 적고 자동 통·번역해 주는 기능 외에 두 가지 기능이 더 있다. 발표자나 발표자의 조수가 기계가 잘못 받아 적은 내용을 수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원문을 제대로 입력만 해도 통역의 품질이 확 올라간다. 또 다른 기능은 참석자들에게 A4 한 장 분량으로 요약한 회의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기능이다.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회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돈 쓸어 담는 통·번역가는 따로 있다
이제 전문 통역사와 번역사는 일자리를 잃게 되나.
“아마추어 통·번역가들이 AI 도구를 활용해 시장에 진입하면서 경쟁은 치열해질 것이다. 아마추어 요리사 중 전문 셰프보다 맛깔난 요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돈을 쓸어 담는 통·번역가들이 따로 있다. 이 사람들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해당 영역을 파는 젊은 친구들이다. 가령, 방탄소년단(BTS) 팬들, 리그오브레전드(LoL) 덕후 중에서 통·번역이 가능한 친구들 말이다. 이들은 보통 휴학한 20대들인 경우가 많은데, 월에 수천만원씩 번다. 마니아들한테 통·번역을 맡겨보면 정말 품질이 다르다. 노래나 게임의 가사와 용어, 팬들만 아는 은어를 잘 알고 미묘한 감성까지 전달한다.”
각종 기술 흐름이 경영에 시사하는 바는.
“특별한 데이터와 콘텐츠를 보유한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오픈AI의 ‘챗GPT’ 등장 이후 수천 가지 챗봇이 나왔다. 특색이 없는 챗봇들은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예전에 각종 소셜미디어(SNS)가 우후죽순 나왔지만, 페이스북 등을 제외하고 거의 사라졌다. 현재 생성 AI 서비스 중 가장 인기 있는 서비스는 오픈AI의 ‘챗GPT’지만,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서비스는 구글의 챗봇 ‘바드(Bard)’가 아니다. 독일 스타트업이 만든 번역 서비스 ‘딥엘(DeepL)’이다. 10년 넘게 백과사전을 번역하면서 축적해 둔 딥엘만의 데이터가 있기에 AI 시대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통·번역 승자는 하이브리드” 플리토가 주장하는 이유들
이정수 플리토 대표는 제대로 된 통·번역 서비스에는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플리토의 각종 서비스에 인간 개입 장치를 두고 있는 이유다. 가령, 플리토는 치과 병원 통·번역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기계가 정확하게 모르는 의학 전문 용어는 플리토의 집단지성 플랫폼 ‘아케이드’에 자동 문의되도록 설계했다. 아케이드 사용자들은 번역, 교정, 받아쓰기 등 언어와 관련된 다양한 퀴즈에 참가하고 플리토 포인트를 받게 된다. 플리토는 이렇게 모은 데이터를 AI 학습용으로 활용한다.
또 플리토는 호텔 컨시어지(편의) 서비스도 개발 중인데, 질문과 답변의 번역은 기계가 하더라도 최종 고객 응대는 반드시 사람이 하도록 권유한다. ‘15분 내 수건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야간 개장이 어렵습니다’ 등 각종 상황 판단을 인간 대신 기계가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트렉’에는 호시 사토(Hoshi Sato)라는 외계어 통역사가 등장한다. 기계가 외계어를 못 알아들으면 사토가 외계어를 공부해서 기계에 학습을 시켜준다. ‘하이브리드(hybrid)’다. 오래전 영화지만, AI 번역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대표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