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중심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바실던에 있는 세계 2위 농기계 업체 CNH 인더스트리얼의 뉴홀랜드 트랙터 공장. 1월 11일(현지시각) 방문한 공장 내부에 들어서자, 투명 고글을 낀 작업자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노레일에 매달린 거대한 트랙터 뼈대에 엔진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이 공장은 연간 1만8000대의 트랙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올해 5월이 되면 이곳에서 트랙터를 생산한 지 60년이 된다. 바실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이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자 잉글랜드 에식스(Essex) 주의회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뉴타운이다. 1950년 대규모 주택 건설 사업이 시작됐고, 도로를 포함한 인프라 건설에 대규모 자금이 투입됐다. 바실던에 공장을 짓는 회사에는 정부 보조금이 지원됐는데, 세계적인 농기계 업체 뉴홀랜드가 보조금을 받아 공장을 건설하고 1964년부터 트랙터를 생산했다. 1895년 설립된 뉴홀랜드는 1999년 CNH 인더스트리얼로 통합됐다.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트랙터는 전부 주문 제작 방식으로 이뤄진다. 엔진 마력은 물론 트랙터 전고(높이)와 운전자 좌석 시트를 천으로 만들지 가죽으로 만들지, 경보기를 어디에 부착할지 등 다양한 옵션을 구매자가 선택할 수 있다.
생산 라인을 무한대로 늘리지 않고 주문 생산을 실현한 비결은 개별 주문에 맞는 설계와 부품, 공구를 제공하는 무인 운반차(AGV·Automated Guided Vehicle) 덕분이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트랙터 차체에 조립될 부품들을 실어 나르는 AGV가 2㎞에 이르는 주요 조립 설비 사이를 바삐 오갔다.
AGV는 소비자가 주문한 맞춤형 트랙터를 만들 수 있는 부품과 공구가 모두 담긴 카트를 작업자 앞으로 실어 나른다. 숙련된 노동자는 주문 번호와 바코드를 확인해 AGV 카트에서 부품과 공구를 집어 작은 태블릿 PC 스크린을 보고 주문에 맞춰 트랙터를 조립한다. 이 작업이 모노레일을 따라 모든 공정을 거치면 맞춤형 트랙터가 완성된다. 뉴홀랜드 측은 하루 생산량을 정확하게 공개하지 않았지만, 주문 제작 트랙터 한 대가 완성되기까지 조립에만 2~3일이 걸린다.
뉴홀랜드가 높은 비용을 감수하면서 주문 제작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전 세계 농기계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수요가 다변화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농업 현장에서 농기계의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개인 취향에 맞는 농기계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었다.
특히 주문 제작 방식은 농기계 시장에도 거세게 불고 있는 전동화 전환·자동화 가속화 바람에 중요한 생산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장에서 만난 숀 레넌(Sean Lennon) 뉴홀랜드 유럽 담당 부사장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업 분야가 기후변화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산업이다 보니 농기계를 이용하는 고객이 탄소 배출 감축 문제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며 “농기계 전동화 수요가 매우 크다”라고 말했다.
농기계를 움직이는 연료를 디젤에서 배터리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연료를 전환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디젤 트랙터에서 전기 트랙터로 바뀌면 운전자가 느끼는 소음이나 진동 수준은 물론 작물 재배 환경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뉴홀랜드 측은 “농기계의 핵심 연료가 전환되는 거대한 바람 속에서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해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전동화 수요는 소형 농기계를 주로 사용하는 포도나 셀러리, 브로콜리 등 고부가가치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에서 크다. 레넌 부사장은 “전동화 수요가 높은 고부가가치 작물 재배 농가가 우리의 주요 타깃 고객”이라며 “전동화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덧붙였다.
뉴홀랜드는 배터리 외에도 새로운 대체 연료를 활용해 농기계를 만드는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2023년에는 소 배설물에서 나오는 가스를 포집해 연료로 사용하는 트랙터 ‘T7’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가축 분뇨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는 대표적인 온실가스인데, 이를 농기계 연료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는 메탄가스를 포집해 자원화함으로써 탄소 배출을 저감하는 것은 물론, 축산업자의 처리 비용을 줄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농기계에 대한 농가 수요가 다변화되는 추세는 농기계 자동화 수준도 끌어올리고 있다. 특히 뉴홀랜드가 초점을 둔 자동화 분야는 자율주행보다는 작물 재배 과정에 필요한 애플리케이션 개발이다.
레넌 부사장은 “일반 도로보다 제한된 공간(논이나 밭)에서 작업하는 농기계의 자율주행 기술 수준은 자동차보다 낮다”며 “단순히 작업 공간을 자율주행하는 기술만 따지면 콤바인의 경우 20년 전부터 이미 상당한 자동화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기계 소비자가 요구하는 자동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훨씬 더 복잡한 과제가 남아있다. 레넌 부사장은 “날씨와 작물의 상태, 성장 속도에 따라 농기계의 작업량이 달라진다”며 “농기계의 애플리케이션 자동화는 농부의 작업을 기계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훨씬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농기계에서 자동화는 단순히 작업 공간 내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물을 재배하는 전 과정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농작물에 화학비료를 뿌리는 스프링을 자동화하기 위해서는 기계가 훨씬 정교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화학비료를 너무 많이 뿌리면 농작물이 죽을 수 있고, 부족하면 병충해를 예방할 수 없다. 게다가 적당한 화학비료의 양을 결정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날씨나 작물의 종류, 토양 상태, 화학비료의 종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뉴홀랜드는 농기계 제조 업체에 머무르지 않고 자동화를 위해 훨씬 정교한 소프트웨어 기술을 발전시키는 회사로 변화하고 있다. 제조 업체로서 명성을 쌓은 뉴홀랜드가 소프트웨어 중심의 내부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CNH는 미국과 네덜란드, 인도 등 세 곳에 글로벌 테크니컬센터를 두고 있다.
한편 뉴홀랜드는 아시아 농기계 시장에서 영역을 확대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과 파트너십도 강화하고 있다. 레넌 부사장은 “LS엠트론은 우리의 중요한 판매망일 뿐 아니라 한국 내 위탁 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중요한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내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