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B-17과 B-29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주력 폭격기였다. 전자는 유럽에서만 64만t 이상의 폭탄을 떨어뜨려 독일의 전쟁 능력을 빼앗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후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6·25 전쟁에도 참전하여 융단폭격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을 막아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명품 폭격기를 만든 회사는 보잉(Boeing)이다. 1916년 미국 시애틀에서 윌리엄 보잉이 창업한 보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소련과 냉전 상황에서 B-52(1952년 미국이 소련에 핵 공격을 하기 위해 개발한 전략폭격기)를 만드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더욱이 민항기 사업 부문에서는 ‘707’ ‘737’ ‘747’ 등 출시한 기종들이 모두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세계 최대 민항기 제조사로 떠올랐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96년 군용기의 명가인 맥도널 더글러스를 인수 합병했다. 이로써 F-4 팬텀과 F-15 이글 등의 명품 전투기 라인업도 갖추게 됐다. 명실공히 민항기 및 군용기 생산 모두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기점으로 보잉의 쇠퇴가 시작됐다.
보잉 쇠퇴의 과정은 ‘디지털 맹신’이 갖는 함정을 보여준다. 합병 당시 보잉은 ‘엔지니어의 회사’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경험 많은 엔지니어들이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피인수 회사인 맥도널 더글러스의 경영진이 합병으로 커진 보잉의 경영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대부분 ‘재무’ 출신들로서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비용 절감에 특화된 것이 기존 보잉 이사회의 마음을 산 것이다. 이들은 보잉에서도 특기를 발휘해, 수많은 엔지니어를 해고하고 그 자리는 컴퓨터와 시급 노동자로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엔지니어의 경험과 ‘내공’은 컴퓨터가 대체하고 비행기 동체 조립 과정에서 단순한 리벳 작업은 무경험 시급 노동자가 대체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더 나아가 회사 내에서 이루어졌던 항공기 동체 제작은 분사(分社)한 후 외주를 주는 아웃소싱 방법도 도입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고 급기야는 2010년 후반부터는 품질 문제가 부각되며 적자의 늪으로 빠져들게 됐다.
이 품질 문제는 하청 업체 노동자들의 미숙련, 생산성을 높이라는 보잉 본사의 압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경영진의 ‘디지털 맹신’도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737 맥스다. 이 회사는 스테디셀러인 이 비행기를 계속 개량해 오면서 큰 재미를 보았지만, 그 개량이 한계에 부딪혔다. 기술진은 완전히 새로운 기체 개발을 주장했지만, 경영진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이를 묵살하고 다시 한번 기존 기체의 개량을 요구했다. 이에 비행기의 동체를 연장하고 강력한 신형 엔진을 달았는데, 이 결과 비행기의 무게중심이 뒤로 이동하며 비행 중 조종사가 기수를 높이면 기수가 과도하게 위로 들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보잉은 이를 기계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비행 소프트웨어를 수정하여 비행기 기수가 과도하게 들리면 자동적으로 기수를 낮추게 했다. 그러나 이런 소프트웨어가 과도하게 잘못 개입하면서 비행기를 땅으로 처박는 추락 사고를 몇 번이나 냈다. 이에 따라 이 기종 전체가 몇 번의 비행 정지를 당했고 항공사의 주문은 에어버스로 몰려가 재무적으로 큰 곤경에 빠지게 됐다.
군용기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미 공군의 노후 훈련기를 대체하는 사업에 보잉은 T-7A라는 기종을 예정가의 반값에 내놓으며 한국의 T-50을 이기고 계약을 따냈다. 컴퓨터로 설계하고 비행 성능 검증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며 3D 프린팅으로 부품을 생산하여 생산 단가를 크게 낮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로 비행기를 만들어 날려보니 기수를 어느 각도 이상으로 올리면 조종 불능에 빠지는 ‘윙락(Wing Lock)’ 현상이 나타났다. 보잉은 이를 재설계 등 기계적 (아날로그적) 해결보다는 비행 소프트웨어를 수정하여 조종사가 아예 어느 각도 이상으로 기수를 들지 못하도록 만들어 해결하려 했다. 이 과정도 시간이 오래 걸려 지금까지도 미 공군에 납품을 시작하지 못했고, 지체 보상금 등으로 이 사업에서 돈을 남기기는커녕 우리 돈으로 조 단위의 손실을 보고 있다. 결국 비용 절감, 효율 향상을 목적으로 채택한 ‘디지털’식 해결 방식에 대한 경영진의 맹신이 이런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보잉의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엿보인다. 많은 기업이 ‘디지털’에 대한 맹신으로 성급한 인력 구조조정을 한 끝에 핵심 경쟁력이 크게 후퇴하거나 정리된 인력이 경쟁사로 넘어가서 그들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 되는 사례도 왕왕 보도된다. 그런데 이는 정치권에도 적용되는 모습이다. 요즘 큰 화두는 대만의 ‘아날로그’식 총선 방식이다. 사람이 투표용지 하나하나를 들어서 확인시켜 주는 이 방식은 지난 20년 이상 전자 개표로 ‘디지털’ 방식을 고집해 왔던 한국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사전투표에서 선관위 직원의 직접 확인 날인이 아닌 인쇄로 날인을 대체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철저한 ‘아날로그’ 방식을 택한 대만의 선거 개표는 이런 부정선거 의혹의 소지를 없애 버렸다. 더구나 효율과 속도를 이유로 ‘디지털’ 방식을 택한 우리보다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대만의 방식이 디지털이 확실히 주지 못하는 신뢰의 문제를 확보해 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디지털에 대한 맹신보다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아날로그가 주는 장점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기업과 국가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점검해 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