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 보기

조립 블록으로 유명한 세계적 완구 기업 레고(LEGO)를 ‘레고 치킨’ ‘레고 분식’처럼 음식점 이름에 갖다 써도 될까. 그동안 우리 특허 재판부의 판결을 보면 상표등록이 가능할 여지가 있었다. 레고는 완구용품으로 널리 알려진 회사이므로 치킨집 이름에 레고를 붙인다고 해서 완구 기업 레고를 떠올릴 사람이 많지 않고, 레고의 명성을 떨어뜨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2020년 11월 레고가 국내 바이오 기업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레고켐바이오)를 상대로 제기한 등록 무효 소송에서 완승했다. 이 판결은 상품군이 달라도 저명 상표의 식별력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판시한 최초의 사례다. 특허법원 제1부(재판장 이제정)는 레고의 주력 사업 분야인 완구용품과 큰 관계가 없는 의료용 약제를 판매하는 회사가 사명에 ‘레고’를 쓴 것이 레고가 오랜 기간 쌓아온 명성과 식별력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2023년 12월 6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레고켐바이오는 사명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승소를 이끈 건 김앤장법률사무소(김앤장)의 특허법원 판사 출신 장현진(사법연수원 33기) 변호사와 20년 경력의 상표 전문가 지민경(변리사 39기) 변리사다. 두 사람은 완구용품 레고의 저명성에 편승할 의도가 없었다는 레고켐바이오의 주장과 달리 대외 홍보 자료에 레고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나 그림 등을 쓴 것을 찾아냈다. 레고가 완구용품뿐 아니라 식기 등 다양한 분야 제품을 만들어 생산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장 변호사는 “그동안 상표등록 무효 판결을 받으려면 (상대방에게) 부정한 목적이 있었는지를 입증해야 했는데 이번 판결로 저명 상표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만 증명을 해도 무효화가 가능해졌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레고 ‘자연사 박물관’. 사진 레고그룹
레고 ‘자연사 박물관’. 사진 레고그룹

회사 홈페이지·IR 자료에 네이버 블로그까지 ‘탈탈’ 턴 김앤장

두 회사 간 분쟁은 2015년 레고켐바이오가 회사 영문명(LEGOCHEMPHARMA)을 상표로 등록하면서 촉발됐다. 레고켐바이오는 이 상표가 포괄하는 상품군(지정 상품)으로 약제용 시럽·정제·캡슐, 남성호르몬제, 마약제, 백신 항생제 등을 적어 냈다. 전부터 완구류, 블록 완구 등을 사용 상품으로 상표를 등록했던 레고는 이의신청을 했다. 특허청 심사관이 상표등록 거절 결정을 하자, 레고켐바이오가 불복해 심판을 청구하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2018년 9월 상표등록이 이뤄졌고 레고는 두 달 뒤 무효 심판을 청구했으나 패소했다. 특허심판원은 레고켐바이오의 지정 상품이 레고가 만드는 제품과 큰 연관성이 없다고 봤다. 또 ‘레고식 생산 방식(lego chemistry)’이 블록을 조립하는 것처럼 화합물을 합성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학술 용어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레고켐바이오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약제류는 약사법에 따라 철저한 관리하에 생산·유통되고 있으므로 레고의 좋은 이미지나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적다고도 판단했다. 

결국 레고 측은 한 달 뒤 특허법원에 심결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냈다. 장 변호사와 지 변리사는 소송 초기에 이기기 힘든 게임이라고 봤다. 특허법원이 특허심판원 결정을 취소하는 비율은 3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안의 경우 레고켐바이오가 ‘소비자가 우리 상표와 완구 기업 레고를 혼동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는데, 그것을 어떻게 흔들지가 관건이었다.

두 사람은 혼동하지 않더라도 매우 높은 수준의 재산적 가치를 가진 상표인 만큼 보호해 줘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레고켐바이오가 기업 홍보 과정에서 레고 블록을 이용하는 점을 들어 레고의 저명성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줬다. 이를 위해 레고켐바이오와 계열사 홈페이지와 각종 인터뷰 기사, 홍보용 책자를 싹 다 뒤졌다. 레고켐바이오가 자신들의 핵심 기술을 설명하면서 레고 블록 모양의 이미지를 넣어 설명하는 것을 법원에 제시했다. 계열사가 만드는 알약 제품에 레고란 이름을 붙인 것도 증거로 냈다. 회사가 직접 만든 홍보자료뿐 아니라 제삼자가 만든 콘텐츠도 증거로 제시했다. 가령 누군가가 네이버 블로그에 레고켐바이오를 설명하면서 완구 기업 레고를 언급한 것도 증거로 제출했다. 레고켐바이오는 소비자가 자사를 완구기업과 혼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일반인이 볼 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레고켐바이오는 회사 IR 자료를 통해 제품 화학 기법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레고 블록’ 그림을 넣어 설명했다. 김앤장은 이를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 사진 레고켐바이오
레고켐바이오는 회사 IR 자료를 통해 제품 화학 기법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레고 블록’ 그림을 넣어 설명했다. 김앤장은 이를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 사진 레고켐바이오

법정서 루이비통 가방 ‘싹둑’…보톡스 상표 지켜내기도

특허법원 판사 출신인 장 변호사는 이번 판결이 우리 법원의 저명 상표에 대한 보호가 선진국 수준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저명 상표는 국내보다 해외 브랜드가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법원에서는 해외 브랜드뿐만 아니라 피고인 국내 기업들도 함께 보호할 수 있는 판결을 많이 내왔다. 장 변호사는 “우리나라 브랜드의 힘이 커지고 다른 나라에 의해 침해되는 사례가 생겨나는 상황에서 저명 상표를 더욱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앤장 지식재산권 소송 그룹에 속한 장 변호사는 2022년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을 대리해 모조 가방을 만든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이끌어냈다. 1심 법원이 루이비통 모조 제품이 부정경쟁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을 뒤집었다. 법원에선 에르메스 버킨백처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품이 아니면 부정경쟁 행위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장 변호사는 이제 갓 출시된 루이비통 신제품 가방을 법정에서 절개해 내부 패턴까지 똑같다는 점을 재판부에 보여주기도 했다.

지 변리사는 글로벌 제약사 엘러간을 대리해 ‘보톡스 상표 수성’ 소송에 참전해 승소를 이끌었다. 엘러간은 보툴리눔 톡신을 주성분으로 하는 의약품 보톡스 개발사로 알려져 있다. 피부 미용에 널리 사용되는 보톡스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고 있기도 하다. 보톡스와 비슷한 보노톡스란 상표를 등록한 국내 화장품 기업과의 소송전에서 엘러간은 승소했다. 보톡스를 상표로 정의한 사전과 특허 문헌, 보톡스 연관 상표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점 등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 까르띠에, 소셜미디어(SNS) 인스타그램 등 해외 유명 기업의 상표권, 특허 소송에 참여했다.

상표권을 둘러싼 소송은 ‘특정 명칭이 얼마나 저명한지’ ‘다른 상표와 오인·혼동의 가능성이 있느냐’가 쟁점이 되는데, 시대 변화나 재판부 구성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가령 ‘사리원’이 북한 지명인지가 과거엔 당연한 상식의 개념이었다면, 재판부가 젊어지면서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반대로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처럼 젊은 층에게서 인기를 끄는 플랫폼은 중장년 판사들에겐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新)문물이다. 지 변리사는 “상표 사건은 트렌드도 빠르게 바뀌고 고려해야 할 점이 정말 많다”라며 “법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그 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을 창의적으로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