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보름 송학농장 대표
영남대 농학 박사, 현 에이징랩 대표, 
현 경북도립대 겸임교수 사진 송학농장
이한보름 송학농장 대표
영남대 농학 박사, 현 에이징랩 대표, 현 경북도립대 겸임교수 사진 송학농장

프랑스 바스크 지방 돼지고기는 전 세계 요리사에게 꿈같은 식재료다. ‘킨토아(Kintoa)’라 불리는 이 지역 토착종 돼지는 육질이 섬세하고, 지방은 올리브 오일 같은 깊은 맛을 자랑한다. 킨토아 돼지는 1980년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척박한 바스크 지역 농부들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돼지 키우기를 꺼렸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샤퀴티에(charcutier) 피에르 오테이자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샤퀴티에는 베이컨이나 햄, 소시지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그는 1990년대부터 킨토아 돼지 복원에 나섰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 암퇘지 136마리, 수퇘지 34마리에 그쳤던 킨토아 돼지 개체 수는 2020년 3000마리 이상으로 불어났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돼지를 키우기 시작하자 이내 이 지역 농부들 삶이 윤택해졌다. 젊은이들 역시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오테이자가 바스크 산간 마을을 살린 공로를 인정해 2006년 최고위 훈장에 해당하는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했다.

송학농장 재래 돼지. 사진 송학농장
송학농장 재래 돼지. 사진 송학농장

한국 재래 돼지 복원 나선 포항 송학농장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포항 송학농장은 이보다 먼저 재래 돼지 복원에 나섰다. 재래 돼지는 흔히 ‘토종 돼지’로 알려진 흑돼지와 다르다. 털 빛깔이 검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토종 흑돼지고기 대부분은 서양 품종과 교배한 잡종이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초반부터 양돈업 수익성을 이유로 일본 도쿄(東京)에서 빛깔이 검은 버크셔 돼지를 들여왔다. 몸집이 크고 빛깔이 하얀 요크셔도 도입해 교배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순수 혈통 재래 돼지는 자취를 감췄다. 뿌리를 찾기 어려운 정체불명 흑돼지만 남았다. 종자 보존 필요성이나 문화적 중요성을 무시한 결과였다.

“돼지 관련해서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다. 샅샅이 뒤져봐야 조선시대 그림, 일제강점기 기록에 재래 돼지 생김새와 분포도 정도가 나온다. 이 자료를 기반으로 전국에서 흑돼지를 사 모았다.”

경상북도 포항에서 만난 송학농장의 이한보름 대표의 말이다. 송학농장은 1980년대부터 재래 돼지에 매달렸다. 1992년부터 제주, 남원, 고성처럼 흑돼지로 유명한 전국 산지에서 흑돼지를 300두 넘게 사들여 키웠다. 문헌에 나온 대로 ‘털이 검고, 코가 길며, 안면 주름이 있고, 턱이 곧은’ 흑돼지만 꼼꼼히 추렸다.

십수 년이 지나서야 실마리가 보였다. 5세대에 걸친 교배를 마치자 마침내 문헌에 남아있는 재래 돼지와 생김새가 꼭 닮은 집단이 탄생했다.

이 대표와 부친 이석태씨는 겉모습만 비슷한 돼지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전 수천 년간 한반도에 정착했던 재래 돼지와 뼛속까지 같은 돼지를 원했다.

이 대표와 아버지는 영남대와 재래 돼지 고유 유전형질 8개를 발굴해 겉뿐 아니라 속도 같은 돼지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공로로 아버지 이씨는 2003년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가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한 오테이자 사례보다 3년 빨랐다.

이 대표는 이후로도 연구를 계속했다. 영남대에서 석사, 박사를 거치며 유전학적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술을 활용한 재래 돼지 연구에 힘을 쏟았다. 2007년에는 재래 돼지 DNA 분석 관련 특허를 취득했다.

“DNA를 분석하면 재래 돼지에는 버크셔, 요크셔 같은 해외 돼지 품종에 없는 염기 서열이 나타난다. 겉보기에 다 비슷해 보이는 재래 돼지 중에서도 유사한 DNA를 가진 집단을 골라내는 기술이다.”

2019년 한국종축개량협회는 송학농장 재래 돼지를 종축(種畜)으로 인정했다. 종축은 우수한 새끼를 낳게 하기 위해 기르는 우량 품종 가축을 말한다. 축산법은 종축 지위를 ‘품종의 순수한 특징을 지닌 번식용 가축’에게만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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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식량농업기구(FAO), 송학농장 재래 돼지 ‘경북돈’ 등재 

2020년 9월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세계 각국 고유 품종을 조사해 등록하는 지역동물다양성 정보 시스템(DAD-IS)에 ‘경북돈’이라는 이름으로 송학농장 재래 돼지를 등재했다. 이 시스템에 오르면 해당 품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해외에서 재래 돼지 품종을 기르고 싶다면 송학농장에 로열티를 내고 돼지를 사 가야 한다. 식량 자원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상업적으로 거래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야생동물은 인간이 잡아먹으면 멸종한다. 가축은 반대로 인간이 안 먹으면 멸종한다. 재래 돼지 가치를 이만큼 살리는 데 30여 년이 걸린 것이다.” 이 대표는 재래 돼지가 “쇠락한 농촌을 살리는 일에 기여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국내 양돈 농가는 매년 큰 폭으로 줄고 있다. 통계청 가축 동향 조사에 따르면 2018년 6188곳이던 양돈 농가 수는 2022년 5695곳으로 4년 만에 8% 줄었다. 사룟값 상승과 인건비 급등으로 양돈 농가 수익성이 급격하게 악화한 탓이다. 국내산보다 저렴한 수입산 돼지고기가 대거 들어오면서 평범한 국내산 돼지고기는 가격 경쟁력도 떨어졌다. 그는 맛으로 차별화해 비싼 값을 받는 재래 돼지가 이런 소규모 양돈에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농장과 별도로 재래 돼지고기 숙성을 연구하는 ‘에이징랩’을 운영한다. 이곳에서 건조 숙성(드라이에이징) 방식으로 가공한 재래 돼지는 시중 일반 돼지보다 10배가량 비싼 값에 팔린다. 그럼에도 미쉐린가이드 등재 레스토랑과 일선 셰프를 중심으로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농업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규모를 키우거나, 차별화하거나. 수백억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농장을 모든 농가가 하는 건 불가능하니, 돼지 50마리, 100마리 키워도 한 가구가 먹고살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