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폴레옹’ 장면. 사진 소니 픽처스
영화 ‘나폴레옹’ 장면. 사진 소니 픽처스
리들리 스콧 감독은 86세의 노장으로 영화 ‘탑건(1986)’을 만든 토니 스콧의 형으로도 유명하다. 리들리 스콧이 만든 영화는 ‘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글래디에이터(2000)’ ‘블랙 호크 다운(2001)’ ‘킹덤 오브 헤븐(2005)’ ‘로빈 후드(2010)’ ‘마션(2015)’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2023년 12월 리들리 스콧이 만든 영화 ‘나폴레옹’이 국내에서 개봉했지만 30만 명에도 못 미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한 달 만에 상영을 종료했다. 러닝 타임만 2시간 40분이어서 예약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고, 1분짜리 밈(meme)에 익숙한 현대인이 몰입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톨스토이의 모티브

영화 ‘나폴레옹’은 주인공의 ‘사랑’과 ‘전쟁’이 두 축을 이룬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나폴레옹은 냉정하고 명석한 야망가라기보다는 정서 불안을 안고 있는 마마보이처럼 보인다. 따라서 조세핀과 나폴레옹의 관계는 연인 관계라기보다는 보호자 관계처럼 보인다.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사랑이 설득력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전쟁은 대단하다. 감독은 프랑스혁명 전쟁(1792~1802)과 나폴레옹전쟁(1803~15)이라는 23년의 기간에서 툴롱 전투(1793), 아우스터리츠전투(1805), 모스크바원정(1812~13), 워털루전투(1815) 등 5개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우스터리츠전투 장면이 특히 압권이다.

아우스터리츠전투는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1세(러시아)와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체코의 아우스터리츠에서 맞서 싸운 전투다. 이 전투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나폴레옹은 눈 덮인 호수에 위장 기지를 만들고 주력 부대는 주변의 숲에 매복시킨 뒤 적을 유인한다. 방심한 적의 주력 부대가 눈 덮인 호수를 가로질러 진격해 오자, 숨어 있던 포병의 집중 사격으로 적의 주력 부대를 차가운 겨울 호수에 수장시킨다. 천지를 울리는 대포 소리, 사람과 말의 비명, 붉은 핏물이 흰 눈과 푸른 강물을 뒤덮는 처연한 전투 장면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상시킨다.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독일 영토를 할양하고, 4000만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프랑스 병력이 7만 명, 병사 1인당 비용이 200프랑 정도였으니, 285%의 수익을 거둔 것이다. 당시에는 전쟁이 국가(왕조) 간 게임에 가까웠다. 전투 병력을 지원한 러시아는 5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20명의 장군과 3만 명의 병사가 포로로 붙잡혔다. 나폴레옹은 800년간 존속하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독일 남부 지역에 라인 동맹이라는 위성국가를 만들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완충 지대를 만든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전투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됐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은행. 사진 셔터스톡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은행. 사진 셔터스톡

초월적인 주변인

나폴레옹은 제노바(이탈리아)가 코르시카섬을 프랑스에 할양한 직후 그곳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고, 볼테르와 루소를 탐닉했으며, 일찍부터 자코뱅(급진파 정당)에 가입했다. 나폴레옹은 1793년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툴롱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장군으로 진급했고, 로베스피에르로부터 ‘초월적인 장점(mérite transcendant)’을 지닌 공화파 장교라는 극찬을 받았다.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나폴레옹도 반역죄로 체포되고 한동안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프랑스 서부 지역은 독실한 가톨릭 지역으로서, 프랑스혁명 이후 왕당파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반혁명 전쟁을 벌였다(방데 전쟁·1793~96). 군사력이 취약한 파리에서 왕당파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혁명정부의 폴 바라스는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진압을 명했다. 나폴레옹은 대포를 이용하여 무자비하게 왕당파를 진압함으로써 혁명과 공화국을 구했다. 1796년 총재정부는 보답으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함정 같은 것이었다. 서류상 병력보다 실제 병력이 터무니없이 적었고, 식량 보급도 없었으며, 장비도 열악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군대를 독려했다. “너희는 충분히 벌거벗고 굶주렸다. 이제 곧 부유한 도시가 너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너희는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과 부를 얻게 될 것이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이론과 실천

1799년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제1 통령이 됐다(브뤼메르 쿠데타). 그의 나이 30세였다. 이로써 혁명은 단절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의 이상이 실현된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으로 종교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종교가 필요하다’는 볼테르의 믿음을 공유했다. 그는 이집트 원정 당시 “무슬림이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1801년 나폴레옹은 혁명과 교회를 화해시키는 조약을 체결한다. 교황 피우스 7세는 프랑스가 공화국임을 인정하고 모든 주교의 사임을 촉구했다. 새로운 고위 성직자들은 제1 통령이 임명했다. 교황은 프랑스의 교회 재산 매각을 인정하고, 예배의 자유를 승인했다. 나폴레옹은 국가의 세속화(정교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실현한 것이다.

1804년 그는 ‘나폴레옹법전’으로 알려진 프랑스 민법(Code Civil des Français)을 공포했다. 이 법전은 개인의 자유, 노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거주이전의자유 등 혁명의 위대한 성취를 영구적인 형태로 제도화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유산계급을 더 많이 보호했고, 고용주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했으며, 여성에게는 제한된 권리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쐐기가 됐다. 나폴레옹은 제1 통령이 주재하는 국가평의회(Conseil d'Etat)를 설치했다. 국가평의회는 행정재판소의 역할을 했으며 새로운 법률의 원천이 됐다. 구체제하에서 인민을 착취하던 지방 행정구역에는 지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법 적용을 감독했다. 세습직이었던 법관을 임명직으로 바꾸고 재판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프랑스은행의 탄생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파가 실시한 명목화폐(지폐)제도를 폐지하고, 금속화폐제도로 복귀했다. 금본위제에 필요한 귀금속은 대외 전쟁을 통해 조달했다. 전쟁 중에는 약탈을 통해 귀금속을 챙겼고, 승리한 후에는 배상금을 받았으며, 새로운 정복지에는 세금을 부과했다. 나폴레옹은 국고 관리, 전비 조달을 위해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했다. 물론 아직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 1720년 존 로가 왕립은행(방크 르와얄)을 통해 국가 경제를 파탄 낸 이후 프랑스에서는 은행(방크)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버렸다. 금기시되는 단어(방크)를 나폴레옹이 끄집어낸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은 여전히 은행(방크) 대신 금고(케스)라는 명칭을 선호했다.

프랑스은행은 1800년 나폴레옹에 의해 독특한 공적 지위를 지닌 민간 기업으로 설립됐고 여러 차례 구조 변화를 거친 뒤 1945년 드골 정부에 의해 국유화됐다. 1803년 파리에서만 은행권(금 청구권을 표시한 약속어음)을 발행했으나, 1848년 프랑스 전역에서 은행권 발행을 독점하게 됐다. 이후 프랑스은행은 점차 기능을 확대하여 현대적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1998년 유로존에 편입됨에 따라 중앙은행 기능을 상실하고 나폴레옹이 정해준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