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반도체 클러스터가 걸어온 길
1987년 대만이 처음 반도체 파운드리 산업에 뛰어들 당시 TSMC는 저가의 산업용 반도체 칩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 포지션이었다. 그렇지만 TSMC의 본격적인 성장은 창업 후 15년간 집중적으로 반도체 칩의 집적도 향상 과정에서 노하우가 축적되며 시작됐다. ‘무어의 법칙’으로 대변되는 MO-SFET-FINFET 같은 트랜지스터의 물리적 스케일 축소, 그에 따른 트랜지스터 집적도의 지수함수적 증가 기조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글로벌 반도체 공정과 양산을 지배했다. 이 흐름을 가장 잘 이용한 회사가 바로 TSMC다. 하지만 2010년대 초·중반 이후, 무어의 법칙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기 시작했다. 이는 둘 중 하나의 돌파구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무리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칩 스케일을 더 작게 만들든지, 칩 스케일은 좀 천천히 축소하더라도 비용을 더 절감하든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TSMC는 이 두 마리 토끼를 공정 기술 혁신으로 잡는 것에 성공했는데, 두 마리 토끼가 사실은 한 마리로 수렴됨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물론 TSMC가 반도체 칩을 설계하거나 새로운 트랜지스터 소자를 개발하는 기업은 아니기 때문에, 소자 혁신에서 비용 절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설계와 공정이 동시에 최적화하는 DTCO(Design-Technology Co-Optimization)를 통해 그들만의 노하우가 축적됐고, 이는 2010년대 무어의 법칙이 붕괴되는 시점 이후 더 강력한 무기가 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TSMC의 강력한 경쟁력은 단순히 파운드리 수율만 좋다는 것에 있지 않다. 설계부터 칩 테이프아웃, 오류 검증부터 양산을 위한 전 공정 최적화 그리고 패키징을 포함한 후 공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완성된 전 주기적 생태계가 그 자신감과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는 대만의 강력한 반도체 생태계와 클러스터가 매우 단단히 형성된 것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대만 반도체 산업의 기틀은 일본 전자 회사들의 직접투자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대만은 정부 주도로 독립적 집적회로 제조 기반을 만들기 위해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특히 막대한 초기 설비투자 비용 조달을 위해 대만은 정부와 산업계가 투자를 절반씩 분담하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1987년에 창립한 TSMC다.
1990년대 들어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 인텔이 주도하던 종합 반도체 모델이 점차 쇠락하고, 본격적으로 설계(팹리스), 제조(FEOL·전 공정), 후 공정(OSAT) 등으로 분야가 세분화하기 시작하면서,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는 본격적으로 클러스터를 이루기 시작했다. 대만의 대표적인 팹리스 회사로는 미디어텍(Mediatek), 리얼텍(Realtek), 노바텍(Novatek), 하이맥스(Himax) 같은 시스템 반도체 전문 팹리스가 있다. 이들이 설계한 칩은 파운드리 업체에서 전문적으로 제조된다. 대표적인 파운드리 기업인 글로벌 1위 TSMC 외에도 대만 2위이자 글로벌 5위권 업체인 UMC 그리고 중소 규모 파운드리인 PDMC, Global wafers, TCE, Powerchip 등이 뒤를 따른다.
전⋅후 공정에서 앞선 경쟁력 만든 대만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 강점은 전 공정뿐만 아니라 바로 이 후 공정에도 기초 체력이 튼튼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으로서 전 세계 1위 후 공정 업체인 ASE 그리고 10위권에 드는 파워테크(Powertech), SPIL, CCP, Walton, Unimicron 등이 탄탄한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2021년 기준, 대만 팹리스 업체의 글로벌 매출 점유율은 2위(22%), 파운드리는 1위(80%), 후 공정도 1위(58%)를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전 공정과 후 공정은 독점에 가까울 정도의 지배력을 보이고 있다. TSMC가 자랑하는 2㎚(나노미터)급 초미세 패터닝 기술은 전 공정 중에서도 핵심적인 공정인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한국의 삼성전자다. 그렇지만 TSMC가 2㎚를 포함한 5㎚급 초미세 전 공정 분야에서 점유하는 비중(80%)은 삼성전자(15%)의 다섯 배 이상이다. 10㎚ 이하급 시스템 반도체 양산이 가능한 파운드리의 80%를 TSMC가 점유함으로써 거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고, 미개척 영역인 2㎚ 이하급, 나아가 옹스트롬급 초미세 공정 기술 역시 대부분의 솔루션은 TSMC가 보유하고 있다. 이는 대만 반도체 산업에 있어 ‘대만이 무너지면 TSMC가 무너지고, TSMC가 무너지면 글로벌 반도체 생산은 그 즉시 마비되며, 그렇게 되면 인공지능(AI)과 정보통신기술(ICT)은 다 죽는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유효기간 끝나가는 대만의 ‘실리콘 방패’ 정책
그렇지만 TSMC와 대만 정부가 간과한 것은 반도체 산업은 이제 더 이상 경제와 산업 논리만 통하는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매년 유례없는 속도로 팽창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 기업의 약진은 글로벌 수준에 이르게 됐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이를 감지했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2030년 정도가 됐을 때 적어도 반도체 제조업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최소 20% 그리고 대만과 커플링이 더 강해지면 중국과 대만의 점유율 총합은 45%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의 대중 기술 및 무역 제재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중국의 반도체 산업 분야 자급 노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대만을 떼어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중국의 반도체 제조업 점유율이 결국 대만마저도 곧 앞지르게 될 것임도 많은 전문가가 전망한다. 따라서 대만의 현재 반도체 산업 경쟁 모델은 앞으로는 지속하기 쉽지 않고, 오히려 중국 반도체 산업이 따라 하기에 적합하므로, 대만의 자리를 조금씩 중국이 차지할 가능성이 커진다. 즉, 대만의 실리콘 방패 정책은 이제 그 유효기간이 거의 끝나간다. 대만이 그토록 중시하는 반도체 산업과 그 영향력은 이제 더 이상 경제·산업적 논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이 업데이트해야 하는 부분은 ‘안보적 관점’에서의 반도체 산업 전략이다. 이는 자국 안보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측면의 안보적 관점을 의미한다. 즉, 대만이 앞으로는 적어도 자국의 반도체 산업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반도체 산업을 들여다보는 안경을 대만이라는 섬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그리고 글로벌 스케일의 필터로 바꿔 끼워야 함을 의미한다.
반도체 전략 변경 불가피한 대만
라이칭더 신임 총통은 취임 일성에서 미국과 관계 강화는 물론, 일본, 한국과 관계 강화에도 더 노력할 것임을 내비쳤는데, 이는 대만 반도체 제조업 수성을 위한 글로벌 전략에 변동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대만의 반도체 전략가들의 시각은 변하고 있다. 대만 반도체 산업 외연 확장의 내실은 본토에, 외형은 외국에 두는 투-트랙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다. 반도체 생산 기지로서의 대만을 바라보는 미국 시선도 바뀌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첨단 반도체 제조의 주력이 동아시아에 쏠려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특히 파운드리의 본산지인 대만의 대체 불가능성, 즉, 실리콘 방패 정책에 연연하지 않는다. 안보 대부분을 미국과 일본에 의존해야 하는 대만 입장에서 미국의 시선이 바뀐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이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투트랙 전략에 변화가 올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대만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대만에서 만드는 원가에 비해, 미국 팹은 최소 1.5배 이상 최대 2배까지도 비용이 증가할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비용 증가 측면이 미국의 높은 물가 때문만은 아니다.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의 강점은 자체적인 문제 해결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태계가 튼튼하게 형성된 것에 있다. 디자인하우스(design house)부터 패키징까지 모두 TSMC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시스템-공정 최적화 전략에 따라 원가 관리에서 경험을 축적하고 또한 파운드리 주변 생태계 형성을 통해 지배력의 저변을 확대해 온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의 강점이 되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러한 생태계 형성이 미국에서 재현되지 않는다면, 미국 팹의 운영은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이제 선수를 둘 수 있는 권한은 대만에 있지 않다. TSMC의 주요 고객이 어느새 애플, 메타, 엔비디아, 구글, AMD, 심지어 인텔 같은 미국의 대형 팹리스 혹은 반도체 업체들로 채워진 지 오래고, 이들의 주문이 10%만 감소해도 TSMC는 다음 세대의 기술 개발 로드맵이 최소 6개월에서 1년 뒤로 밀리는 것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의존도가 심해졌다. 대형 고객의 주문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는 파운드리 산업의 고유 특징인 높은 설비투자 비중을 감당할 수 있으나 주문량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는 오히려 과도한 선행 설비투자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동아시아 3국 협력 강화해야
결국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는 그간 강력한 전략적 강점의 근거가 돼 준 반도체 기술력, 매출 지배력, 공급망에서의 핵심 노드로서의 포지션이라는 강점을 다시 들여다볼 시점이 됐다. 미국은 앞으로도 TSMC를 포함한 대만 반도체 업체들로 하여금 더 많은 대미 직접투자를 종용할 것이며, 중국과 디커플링 압박을 강화할 것이다. 중국 역시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의 3연임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이고, 대(對)대만 직접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대만 반도체 기업의 중국 현지 사업을 통제하면서 대만 경제에 고통을 가하려 할 것이다. 대만이 전략을 수정해야 할 부분은 자국 중심으로 최적화됐던 첨단 반도체 생산 비용 절감 및 생태계 구성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일본의 구형 팹 인수나 현지 연구개발(R&D)센터 건립 등의 소극적 투자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미국과 전략적 협력이 가능한 다른 반도체 강국인 한국, 일본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적극적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그러한 평화로운 산업 무대가 아니다.
올해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를 위시한 여러 첨단산업에서 경쟁력이 곧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것을 근거로 계속 패권 경쟁을 할 것이며, 양국은 각 첨단산업에 참여하는 주요 핵심 국가들로 하여금 선택과 집중을 강요할 것이다.
대만 정부는 이제 조속히 한국과 일본에 외교 특사를 보내, 적어도 첨단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동아시아 3국(한국·일본·대만)의 전략적 협력을 통한 공동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협의체 구성에 적극적 참여 의향이 있음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분야 협력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약한 패키징 분야에서 협력, 대만이 상대적으로 약한 메모리 반도체에서 협력 같은 상호보완적 협력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경쟁 무대인 옹스트롬급 시스템 반도체 생산공정 최적화를 위한 소재, 공정, 구조 기술 공동 개발 등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반도체 산업 복잡도와 경제 민감성 그리고 이제는 경제 안보적 맥락에서 중요성은 어느 한 나라, 한 회사가 감당할 정도를 벗어난 지 오래며, 동아시아 3개국은 이 중요성을 앞으로도 국가의 글로벌 영향력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국 반도체 산업이 2030년 이후 세계 최대 영향력을 갖게 되면 이러한 논의조차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