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 계획은 언제나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식이다. 현실적으로 위기가 닥칠 때까지 ‘아래한글’ 파일로 만들어 놓은 문서는 열어 본 적이 없고 출력해 제본한 책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방치돼 있다. 모든 기업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위기관리 계획을 수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회사는 위기관리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위기관리 사전 준비를 했다고 실제 위기 발생 시 성공적으로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전 준비에 투입할 예산을 효과 없는 비용이라고 인식하는 리더도 있다.
최근 기업의 위기 원인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문화, 의사 결정권, 역량, 운영의 프로세스, 관리 방식, 체계 기준 등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사람’과 관련된 영역이다. 관행적인 일선의 일하는 방식, 의사 결정 기준, 내부 정책에 대한 준수, 고객을 포함한 이해관계자의 행위 등이 영향을 준다.
식품 제조 공정에서 발생한 직원의 사망 사고, 통신 회사의 정보 유출 사건, 인터넷 플랫폼 회사의 데이터센터 화재 사고, 시멘트 생산 회사의 끼임 안전사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회사에서 만연한 직장 내 괴롭힘 등은 어쩌다 발생하게 된 단편적인 사건·사고가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단순히 사건·사고와 관련된 ‘그 사람의 실수’로 바라본다면, 위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이런 문제는 반복적으로 발생할 것이고 그 원인이 해결되기 어렵다는 내부 확신이 생겨 인재 이탈, 인력 충원의 어려움, 조직 운영에 대한 비용 증가, 기업 명성 하락 등으로 연결된다. 도대체 위기관리 사전 준비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객기 충돌 후 ‘기적 같은 18분’
2024년 1월 2일 일본 국적 항공사인 일본항공(JAL)의 여객기와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도쿄 하네다 공항 활주로에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륙 준비 중이던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대기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활주로에 진입했다가 발생한 사건이다.
충돌한 비행기는 화재가 발생했다. 해상보안청 비행기에는 조종사 1명을 포함해 총 6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조종사를 제외하고 전원 사망했다. 반면 착륙하면서 충돌한 일본항공 여객기에는 세 명의 조종사와 12명의 승무원이 탑승했고 승객은 374명이었는데, 모두 무사히 비행기에서 탈출해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기내에서 다 나오자마자 기체는 바로 전소됐다. 비상 탈출용 슬라이드는 기체 앞쪽에 2개, 뒤쪽에 1개가 펼쳐졌다. 약 400명의 인원이 좁은 기내에서 이동해 3개의 슬라이드로 10여 분도 안 되는 시간에 탈출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이는 평소 위기 대응 학습이 잘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종사 세 명은 승무원이 기체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알지 못했고 충돌로 인해 비행기 내부의 마이크 시스템도 손상돼 승무원들이 자기 목소리로 승객들에게 대피 안내를 했다고 한다. 일본 언론은 이번 탈출을 ‘기적 같은 18분’이라고 표현하면서 승무원이 위기관리의 비상사태 매뉴얼대로 잘 인도했고 일본 승객도 잘 따라서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항공사 대변인은 승무원들이 짐을 꺼내지 말아라, 하이힐을 벗어라, 머리를 낮추어라 등 동시에 크게 소리를 내면서 승객을 탈출 슬라이드 출구로 안내했다고 한다. 이 행동 가이드는 비행기 비상 탈출 시 꼭 지켜야 하는 안전 수칙이었다. 개인 짐을 꺼내려다 보면 통로를 막게 돼 당연히 탈출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하이힐을 신고 있으면 대피 슬라이드 표면이 찢어져 대피가 어렵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상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혼란한 상황에서 행동하기 어렵다.
위기관리 사전 준비 핵심은 ‘위기 학습력’
미국 언론에서는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대피할 수 있는 이유를 일본의 국민 문화로 언급하기도 했다. 지진 같은 재해에 자주 노출되면서 일반 국민이 긴급 대피 매뉴얼에 규정된 기준을 잘 따르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사고 당시 상황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빠르게 전해졌는데, 내부 상황을 보면, 승객들의 당황하는 모습과 화재 발생 직후의 긴박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 영상을 보면, 승무원들이 놀란 승객들을 진정시키고 노력하고 대부분 사람은 비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승무원 지시를 따르는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문화적인 요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준비된 매뉴얼의 내용과 기준을 긴급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위기 학습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기관리 사전 준비의 핵심이다. 위기 계획이 ‘구식’이라는 의미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다. 위기 학습력을 높이지 못하는 위기관리 체계는 구식일 수밖에 없다.
항공기에 탑승하면 출발 전에 승무원들이 안전 수칙, 비상 탈출 대비 등을 안내한다. 대부분의 승객은 별반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하나의 습관처럼 반복적으로 상황을 언급하고 기본적 대응 방식을 설명하는 1~2분도 안 되는 이 행동은 ‘위기 학습력’을 높이게 된다. 승무원들은 항공 안전 수칙을 주기적으로 암기하고 만약을 대비한 대피 훈련을 정기적으로 받는다. 반복된 훈련과 아주 기초적인 내용의 수칙이라도 매번 강조하는 것만이 위기관리 계획을 ‘최신’으로 만들 수 있다.
훈련의 중요성
훈련을 해야 ‘구식’의 기준을 발견한다. 출입구만 20개가 되는 지하상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대피하는 훈련을 진행한 적이 있다. 상가 내부 상황을 실시간 볼 수 있는 폐쇄회로(CC)TV 위치와 현장에서 긴급 대피를 지시하는 담당자가 가지고 있는 대피 공간 위치 번호가 실제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중앙 관리소에서 CCTV를 확인해 위치를 말할 때, 담당자가 확인하는 위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모의 훈련이었지만 긴급함을 요하는 실제 상황이었다면 현장의 혼란으로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훈련 과정에서 대피 안내를 하는 담당자들이 화재 지점에서 제일 가까운 출입구로 대피를 지시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지하철이나 지하상가와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인명 피해는 화재로 발생한 연기와 함께 대피하는 과정에서 출입구 한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병목 현상 탓에 이동이 어려워 사상자가 더 늘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조치였다. 그런데 매뉴얼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므로, 담당자들은 최대한 이동 동선을 짧게 가져가는 대피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는 평상시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 훈련을 하더라도 실질적 상황과 문제점을 제대로 따지고 검토하지 않았다면 위기 학습력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위기 학습력을 높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귀하의 기업은 오늘 위기가 발생할 경우, 이를 처리할 준비가 돼 있습니까?”
위기관리 계획은 시작일 뿐이다. 그 계획을 가지고 훈련을 실행하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데이터센터에 불이 났다면, 건물이 무너져 운영 시스템이 중단됐다면, 부품 공급 지역에서 지진이 나서 원활히 공급되지 않는다면, 임원의 행동으로 지금 당장 SNS에서 기업에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면, 상황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긴급한 상황에서 정말 대피가 가능할까, 사람들이 계획대로 움직여줄까, 대피의 장애 요인은 무엇인가, 발생한 사건·사고가 어떤 영향을 미칠까, 비즈니스 서비스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알고 있나,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이 가능할지, 언제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할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따라야 한다.
이제 앞에서 했던 질문을 “2024년 귀하의 기업에서 위기 대응 훈련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은 무엇입니까”로 바꿀 필요가 있다. 올해는 즉각적이고 결단력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위기 학습력을 높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