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소식으로 온 국민이 TV 앞에 모여 ‘대한민국’을 외쳤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휴대전화로 실시간 축구 중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불과 5년 뒤인 2007년 휴대전화 개념을 완전히 바꾼 ‘아이폰’이 등장했다. 고(故)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아이폰을 사용하는 건 인생 전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말한 대로 아이폰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다양한 기능이 손안의 하나의 장치에 통합되며 우리 일상생활에 혁신을 가져온 게임체인저가 됐다.
당시 필자는 산업통상자원부 신(新)산업창출정책을 총괄하고 있었고, 정부 차원에서도 모바일 신산업 활성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이폰의 영향력 분석을 바탕으로 정부 주도의 국책 과제 지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 노력과 기업의 혁신을 바탕으로, 2011년 삼성전자의 갤럭시는 선두인 애플 아이폰을 누르고 글로벌 스마트폰 점유율 1위에 올랐고, 그사이 휴대전화 전통 강자로 알려진 노키아와 모토롤라는 새로운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2024년 2월 애플은 또 한 번의 혁신을 예고하며 ‘착용형 공간 컴퓨터’라고 지칭한 ‘비전 프로’를 출시했다. 과연 비전 프로는 아이폰에 이어 새로운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까.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인 인간은 보다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기기를 제작하고 발전시켜 왔다. TV, 모니터 같은 고정형(fixed) 제품에서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휴대용(portable) 기기를 넘어 양손을 자유롭게 하는 착용형 웨어러블(wearable) 기기로 발전하고 있고, 다가오는 미래에는 피부에 심거나(embedded) 부착하고(attachable), 장기에 내장하는 이식형(implantable) 기기 형태로 인간과 일체화를 꿈꾸는 상황 속에서 현재 비전 프로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다가온다.
시작된 XR 기기 전쟁
비전 프로는 사용자의 움직임과 손동작을 감지하는 3D 인터페이스와 소니가 단독 공급하는 3391PPI(인치당 픽셀) 수준의 초고해상도 올레도스(OLEDoS) 패널을 앞세워 몰입형 콘텐츠를 제공하며 혁신을 이끌 새 플랫폼으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폰 출시 초기에 낮은 배터리 성능, 어색한 화면 크기 등 애플엔 획기적이지만 대중에겐 사소한 변화에 불과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라는 혹평을 받았던 것처럼 비전 프로도 무게, 배터리 등 하드웨어 측면과 콘텐츠 부재, 높은 가격 등의 한계로 ‘너무 이른’ 혁신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럼에도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선 2024년을 대형 플랫폼 기술 패권 경쟁이 시작되는 시대로 표현하며 XR(eXtended Reality·확장 현실) 등 공간형 컴퓨터가 ‘생활에 필요한 도구’로 발돋움해 나가는 해가 될 것이라고 봤다. 이를 뒷받침하듯 XR 디스플레이 시장은 2029년까지 연평균 29.3%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2023년 2144만 대에서 2029년 1억 대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30년에는 XR 시장 규모가 스마트폰 시장의 13% 수준으로 확대되며 지하철을 비롯한 일상에서 XR 기기를 착용하고 허공에 손을 움직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XR은 활용 범위가 넓고 미래 확장성 또한 큰 시장으로, 기기를 활용해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가상공간에 모여 회의하거나 비행, 선박, 군용 드론 등 특수 목적의 훈련 시뮬레이션, 몰입감 있는 가상 여행, 원격의료 등 영화 속 묘사된 장면이 일상생활에 실제로 구현되기까지 한 발짝 가까워졌다.
유럽, 미국 등 글로벌 기업들은 일찍이 XR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 2010년부터 XR을 10대 미래 핵심 전략 기술 중 하나로 지정하고 기술 개발과 생태계 구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중국도 ‘VR 산업 발전 실천 계획’을 통해 2026년까지 핵심 기술 보유 100개 기업 육성, VR 기기 2500만 대 생산과 10개 분야 융합 선도 단지 조성 등을 목표로 가상현실 산업을 68조원 규모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개최한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 박람회 CES 2024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XR 기기가 공개되며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형 XR 소부장 공급망 구축해야
국내 기업들도 XR 산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CES 2024에서 3500PPI 수준의 올레도스 패널을 공개했으며, 삼성전자는 구글, 퀄컴과 협력하여 연내 XR 헤드셋 출시 계획을 밝혔다. LG디스플레이도 SK하이닉스, LX세미콘과 기술 협업 구조를 기반으로 XR 연구개발(R&D)에 집중하고 있고, LG전자는 XR 사업화 조직을 꾸려 전문인력 채용에 나서며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가 긴밀히 움직이고 있다. 다만 XR의 핵심인 디스플레이는 제조 원가의 약 50%에 달하는 중요한 기술이나 반도체 설계 역량을 갖춘 중소 XR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들이 대만, 일본에서 해외 외주 방식으로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패널을 제작하고 있는 상황으로 국내 공급망 구축이 미흡하고, 광학 모듈·부품은 국내 기업 기술 수준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해외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한국의 XR 생태계도 충분히 승산은 있다. 기존 유리 기판이 아닌 실리콘 웨이퍼 위에 유기물을 증착해 만드는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생산을 위해선 미세공정에 강점이 있는 반도체와 협업이 필수인 기술이다. 국내 산업 위상이 최고 수준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긴밀한 협력은 XR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우수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에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2023년부터 XR 시장 주도권 확보를 위해 반도체, 광학 부품, 전자, 콘텐츠 업계와 제조 기반의 협력 체계를 구축한 데 이어, XR용 디스플레이와 광학 모듈을 포괄한 XR 제조 핵심 15대 전략 기술을 도출해 정부 지원책 마련 요구를 위한 ‘XR 산업 전략 포럼’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해 왔다. 또 산업통상자원부에서는 올해 초고해상도, 고휘도를 위한 4000PPI급 XR용 마이크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 개발 등을 지원하는 ‘디스플레이 혁신 공정 플랫폼 구축 사업’과 AR Glass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메타버스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사업을 통해 XR 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한 다양한 혁신 R&D를 지원할 예정이다.
과거 아이폰에 대응해 산업 전반에 걸친 종합 지원으로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시장 주도권을 잡았듯이 2024년 XR이라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맞이해, 국내 XR 기업 주도의 제품 개발을 위한 핵심 R&D 발굴과 XR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시장 진출을 위한 기반 마련 그리고 실질적인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교류 활성화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XR 소부장 기업을 육성하는 등 정부와 업계가 협력해 향후 시장에 적극 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내 패널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XR 기술 개발과 기반 구축을 통해 초기 단계부터 역량 있는 다양한 소부장 기업이 함께하는 개방적이고 자립 가능한 생태계가 구축돼야 한다. 또 기술 공백 영역에 대한 정부 지원을 토대로 기존 산업 경계를 허물고 산업 간 융합과 협력이 선행돼야 안정적인 ‘한국형 XR 소부장 공급망’이 구축될 것이다.
유년 시절 누구나 한번쯤 해본 ‘이인삼각’ 달리기는 두 명이 서로의 발을 묶고 함께 달리는 종목이다. 둘 중 한 명이 빨리 달린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스플레이, 반도체, 광학, 전자, 콘텐츠 업계가 모두 하나가 돼 조화롭고 균형 있게 나가야 한다. 국내 업계가 XR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플레이어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