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스’. 사진 IMDB
영화 ‘유스’. 사진 IMDB

창을 열면 알프스의 풍경과 청량한 공기가 잠을 깨우는 아침, 일류 요리사가 제공하는 근사한 식사, 의료진의 건강검진, 수영과 일광욕, 마사지와 사우나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면 흥겹고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휴양지엔 활기와 의욕이 넘칠 것 같다. 그러나 휴가가 일상이 되면 평온은 권태와 손잡는다. 생명은 희미하게 바래고 삶은 멀리 달아난다.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스위스 고급 호텔의 장기 투숙객 프레드도 은퇴 생활을 즐기지 못한다. 기사 작위를 주겠다며 특별 공연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달라는 영국 왕실의 요청도 거절한다.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성공한 작곡가로 살았지만 명성과 영광은 저녁놀처럼 인생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노년의 텅 빈 해변으로 밀려드는 건 후회와 미련, 의무와 책임의 파편들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겼는데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픔은 치유되지 않는다. 프리마돈나였던 아내는 병상에 누운 지 10년이 넘었고, 이혼 위기에 처한 딸은 자신의 불행이 성공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아온 탓이라며 원망을 퍼붓는다. 음악에 평생을 바치느라 외면했던 감정과 덮어둔 상처들이 뒤늦게 비명을 내지른다. 그는 절망스럽게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늙어버렸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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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축구 스타와 젊은 유명 영화배우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프레드의 친구이자 거장이라 칭송받는 영화감독도 마지막 걸작을 만들겠다고 열정을 불태우지만, 그의 일상을 지배하는 건 오줌을 배출하지 않는 전립선이다. 캐스팅하려던 배우는 출연을 거부하며 그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비수까지 꽂는다. 세간의 칭송 뒤에 감춰진 개인의 삶이란 대개 운석에 얻어맞은 달 표면처럼 깊고 퍼런 멍투성이다. 

배부르고 등 따습고 몸 편한 걸 행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조금 더 멀리, 훨씬 더 높은 곳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타인의 인정과 세간의 찬사에 우쭐해질 때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결국 행복이란 ‘나 이렇게 잘 살아 있어!’ 하고 느끼는 자각의 짧은 순간이다.

세계 미녀대회 우승자가 백치 미인이라는 편견을 이기고 당당히 가슴을 내밀며 자신을 뽐내듯, 행복은 젊고 눈부시게 빛나고 싶은 모든 생명의 소망이다. 나이와 건강 문제로 더 이상 필드에서 뛸 수 없는 왕년의 축구 스타는 아무도 없는 코트에 버려진 테니스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며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작곡가는 음악을 만들 때, 감독은 메가폰을 잡을 때, 행복을 바랄 새도 없는 몰입의 순간 행복은 그들 머리 위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모든 걸 다 이루고 휴양지에 여생을 맡긴 세계적 거장들보다 매일 출퇴근하며 직업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의료진, 마사지사, 관객 앞에서 노래한 뒤 식당에서 혼자 갈비를 뜯는 가수가 행복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미녀 앞에서도 물속 깊이 가라앉은 것 같은 무력감에 빠져 있던 프레드를 건져 올린 건 호텔 복도를 지날 때마다 들려오던 어린아이의 어설프고 거친 바이올린 연주다. 그의 예민한 귀를 괴롭힌 불완전한 소음은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은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내가 아내를 위해 만든 곡이란다.” 그가 말하자 눈앞의 노인이 작곡가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서도 아이는 연습하며 느낀 감상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이 곡은 정말 아름다워요.”

영국 왕실이 최고라고 추켜세울 땐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아이의 칭찬에는 꽉 닫혀 있던 프레드의 마음이 창을 연다. 완전함은 감탄할 수 있을 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순수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은 채워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곳에 ‘나’가 들어설 자리가 있고 변화시킬 동기가 싹트고 완성해서 꽃피우리란 설렘이 자란다.

영화 ‘유스’. 사진 IMDB
영화 ‘유스’. 사진 IMDB

프레드는 자연 한가운데 앉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손짓한다.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의 울음소리, 그들의 목에 달린 방울 소리, 숲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가지를 흔드는 바람과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의 합창. 프레드는 지금껏 삶의 작곡가로서, 운명의 지휘자로서 인생을 잘 컨트롤해 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착각과 오만은 아니었을까? 자연과 우주가, 운명과 인생이 그를 지휘해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니었을까?

세계적인 거장 감독도 자기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결말을 몰랐다. 살아서 준비해야 할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살아 있는 한 겸손하게 배우고 일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프레드는 더 잘해야 했다는 자책과 나이를 핑계 대며 이만하면 됐다고 도망쳤던 자기기만을 멈추기로 한다. 프레드는 무기력하게 그를 가두고 있던 휴양지를 떠나 세상이란 무대, 삶의 지휘대에 다시 선다. 녹슬도록 방치했던 인생의 오케스트라를 조율하고 선율을 다듬고 박자를 맞추고 새로운 무대를 완성한다.

인생은 의외로 단순하다. 영화의 주요 테마가 되는 프레드의 대표곡은 ‘심플 송(Simple Song)’이다. 젊었을 땐 앞뒤 안 보고 뛰어들지만 아름답고 지혜롭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육체의 나약함을 수용하되 정신은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 제 발로 찾아와 목을 조를 때까지 살아가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다.

프레드는 식당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노부부를 지켜보곤 했다. 정장을 차려입고 우아하게 식사하면서도 말이 없는 그들은 파경을 맞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대화하며 뜨겁게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세상이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속속들이 타인에게 가치를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해도 자기만의 길을 찾아 걷는다면 그 누가 공중 부양인들 불가능하다고 조롱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처음 배울 때 입은 상처와 아픔을 잊고 오직 신나게 자전거를 달린다. 젊음을 망각한 사람들만 실패에 연연하고 한숨 쉬며 다시 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표 지점을 벗어나 엉뚱한 지점에 착지한 패러글라이더처럼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 대견하다, 수고했다, 스스로 칭찬해도 좋지 않을까? 미완성으로 끝날지라도, 미완성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휘해야 하는 삶이라는 오케스트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