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가격대로 즐길 수 있는
마주앙 모젤,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사진 롯데칠성
합리적인 가격대로 즐길 수 있는 마주앙 모젤,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사진 롯데칠성
대한민국의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마주앙에 대한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마주 앉아 즐기다’라는 뜻의 마주앙. 최장수 국산 브랜드지만 요즘은 안타깝게도 수입 와인에 묻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문화유산을 레이블로 두른 멋진 모습을 접하고 반가운 마음에 마주앙을 취재했다. 마주앙은 어떻게 시작됐고 최근 출시된 달항아리와 간송 에디션은 어떤 와인일까.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1970년대 경북서 탄생한 마주앙

마주앙이 탄생한 계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경사지에서 와인을 만드는 것을 본 박 대통령은 동행했던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 박두병 회장)에게 와인 생산을 제안했다. 식량난에 허덕일 때라 쌀로 빚는 술의 생산은 엄두도 내기 힘든 상황에서 과실주인 와인은 좋은 대안이었던 것이다.

1973년 동양맥주는 독일의 와인 산지와 기후가 유사한 경북 영일군 일대에 포도밭을 일구고 경북 경산에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마주앙의 첫 출시는 1977년 5월. 시판과 함께 마주앙은 아시아 최초로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미사주가 됐다. 지금도 전국 성당에서 사용하는 미사주는 모두 마주앙이다. 레드 와인은 머스캣베일리 A, 화이트 와인은 사이벨 품종으로 만든다. 교구청이 품질을 관리하고 해마다 8월이면 경산 공장에서 미사주 축복식이 열린다. 마주앙의 47년 역사를 처음부터 함께한 와인이지만 미사주는 교구청에서 전량 매입하기 때문에 시중에는 판매되지 않아 맛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마주앙 달항아리를 만드는 비냐 아키타니아의 포도밭. 
장엄한 안데스 산자락에 있다. 사진 비냐 아키타니아 홈페이지
마주앙 달항아리를 만드는 비냐 아키타니아의 포도밭. 장엄한 안데스 산자락에 있다. 사진 비냐 아키타니아 홈페이지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와인 판매대를 살펴보면 다양한 마주앙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 익숙한 이름이 바로 마주앙 모젤(Mosel)이다. 마주앙 모젤은 1987년 출시된 뒤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아 온 화이트 와인으로, 필자에게 와인의 매력을 처음 깨우쳐 준 와인이기도 하다. 독일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인 모젤에서 생산된 리슬링 와인이며 현지에서 병입까지 완료한 제품이다. 품질도 독일 와인 중 최고에 속하는 카비네트(Kabinett) 등급이지만 가격은 2만원대로 매우 합리적이다. 은은한 단맛과 상큼한 산미가 맛있는 균형을 이루고 과일 향이 신선하며 달콤한 꿀 향과 화사한 꽃 향이 매력적이다. 알코올이 8.5% 정도여서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마주앙 달항아리. 사진 롯데칠성
마주앙 달항아리. 사진 롯데칠성

다양한 매력으로 재탄생한 마주앙들

최근 마주앙은 달항아리와 간송에디션을 출시했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미래로 전해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와인들은 한국의 멋을 듬뿍 담은 레이블을 두르고 있어 외국인에게 선물하기에도 그만이다. 달항아리 레이블은 민화 작가인 소혜 김영식이 그렸다. 마주앙은 한국인의 입맛에 꼭 맞는 와인을 찾기 위해 수많은 리서치를 시행하고 전 세계의 다양한 샘플을 시음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선정된 와이너리가 칠레의 비냐 아키타니아(Viña Aquitania). 샤토 마고와 볼랭저 등 프랑스의 유명 와이너리에서 평생 와인을 만든 와인 메이커들과 칠레의 와인 컨설턴트가 함께 설립한 실력파 와이너리다. 달항아리에는 이들이 만든 카베르네 소비뇽이 담겨 있다. 농익은 자두와 블랙체리 등 부드럽고 풍부한 과일 향이 레이블 속 달항아리와 푸근한 조화를 이룬다.

간송미술문화재단과 협업해 만든 간송에디션은 마주앙의 아이콘급 와인 시리즈다. 프랑스의 유명 산지인 라랑 드 포므롤(Lalande de Pomerol), 뉘 생 조르주(Nuits Saint Georges), 뫼르소(Meursault)에서 생산된 와인 3종으로 구성되어 있고 레이블은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으로 장식되어 있다. 겸재가 벗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교환하며 완성한 화첩이 경교명승첩이니 마주 앉아 함께 즐기는 마주앙의 의미와도 더없이 잘 어울린다. 게다가 경교명승첩의 그림들이 모두 한강 변의 명소를 그린 것이어서 와인을 즐기며 레이블을 감상하노라면 조선의 선비가 되어 향긋한 술을 마시며 풍광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마주앙 간송에디션(압구정, 목멱조돈, 송파진). 사진 롯데칠성
마주앙 간송에디션(압구정, 목멱조돈, 송파진). 사진 롯데칠성

라랑 드 포므롤은 지금의 가양동에서 바라본 남산의 일출 장면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을 레이블에 두르고 있다. 보르도 안에서도 라랑 드 포므롤은 맛이 깊고 풍부한 메를로를 생산해 그 잠재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와인은 보르도에서 100년 넘게 와인을 만들어온 티엔퐁(Thienpont) 가문의 샤토 드 레투알(Chateau de L’etoile)이 만들었다. 잘 익은 검은 자두와 블랙베리의 농밀한 풍미가 남산 위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과 사뭇 닮았다.

뉘 생 조르주의 레이블에는 300년 전 압구정의 모습이 담겨 있다. 뉘 생 조르주는 부르고뉴에서도 손꼽히는 피노 누아 산지이며, 이 와인을 만든 도멘 루이 플뢰로(Domaine Louis Fleurot)는 3대째 내려오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뉘 생 조르주의 탁월한 테루아에서 생산된 이 와인은 루비 빛이 영롱하고 매끈한 질감에서 체리와 라즈베리 등 산뜻한 과일 향과 은은한 꽃 향이 피어오른다. 와인의 섬세하고 우아한 아로마가 압구정의 고즈넉한 옛 풍경과 상당히 잘 어울린다.

간송에디션 중 유일한 화이트 와인인 뫼르소에는 송파진이 그려져 있다. 뫼르소는 세계 최고의 샤르도네 산지이며, 이 와인의 생산자인 도멘 고프루아-제이콥(Domaine Gauffroy-Jacob)은 1938년에 설립된 부르고뉴의 정통파 와이너리다. 샤르도네의 부드러운 맛과 오크 숙성의 복합 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와인은 과일 향이 풍성하고 버터와 견과 등 고소한 풍미가 입맛을 돋운다. 송파진의 짙푸른 녹음이 와인의 싱그러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간송에디션 3종을 나란히 배치하면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과거 한양의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옛 모습 대신 와인이 시가 되어 겸재의 그림 속에 담긴 느낌이다.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이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찾아가 함께 마주앙을 나누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