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면 고인 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생이 다할 때까지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이 되고 싶습니다.”
김웅기(73)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은 은퇴 계획을 묻는 말에 이렇게 말했다. “철저히 기업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에게 ‘은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김 회장은 전 세계 섬유 패션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서른다섯에 퇴사하고 1986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글로벌세아의 모태인 세아상역(당시 세아교역)을 창업해 세계 최대 규모의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으로 일궜다. 또 나산, 쌍용건설, 태림페이퍼, 발맥스기술, 세아STX엔테크, 전주페이퍼 등을 인수합병(M&A)해 2023년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글로벌세아는 2025년까지 매출 10조원, 영업이익 1조원 달성을 목표로 한다.
‘플라잉 맨(Flying Man)’이라는 별명처럼 김 회장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전 세계 현장을 누빈다. 그는 출장길 기내에서 틈틈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한 글을 모아 최근 경영 에세이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를 펴냈다. ‘남들이 걷고 뛸 때 나는 늘 지구 위 어딘가를 날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엔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과테말라, 니카라과, 아이티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일궈 온 도전의 순간들이 담겼다.
2월 6일 서울 강남구 세아빌딩 본사에서 만난 김 회장은 책 속 문장처럼 담담하고 담백한 말투로 출간 소회(所懷)를 밝혔다. “과거를 모르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현대를 사는 청소년과 미래의 젊은 창업자에게 38년 전의 창업과 경영에 대해 들려주고 싶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더 값진 미래를 설계하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세아상역은 창업 후 38년간 한 번의 적자 없이 지속 성장해 왔다. 비결이 무엇인가.
“변함없이 지켜온 원칙은 ‘도전 정신’이다. 낯선 대륙에 진출할 때도, 모두가 망한 사업에 후발 주자로 나설 때도 도전 정신으로 뜻을 밀고 나갔다. 1995년 처음 사이판에 진출할 땐 모두가 안 된다며 말렸다. 이미 현지에 있던 34개 공장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며 사업을 접고 있었다. 그러나 자동화 설비를 갖춘 공장을 짓고, 숙련된 인력으로 생산성을 높여 ‘제2의 창업’을 일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바람개비를 돌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농사를 짓는 천수답(天水畓) 경영이 아닌, 주변의 모든 용수를 이용하는 수리답(水利畓) 경영이어야 기업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로 미개척지이거나 다른 기업이 실패한 국가에서 황무지부터 일궜다.
“경영자는 좁은 길은 넓히고 막힌 길은 뚫어야 할 책임이 있다. 경영자가 그런 각오로 경영에 임해야만 회사가 정진할 수 있다. 미개척지는 회사와 공장에서 원하는 기능과 기술, 사고를 그대로 전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업의 성공과 실패에는 모두 이유가 있기에, 후발 기업들은 선발 기업들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답습하지 않으면 단기간 내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
세아상역으로 의류 OEM·ODM 1위 기업이 된 후 M&A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M&A를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영업이익이 전년도와 같을 때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유지했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가? 그 순간 추락은 시작된다. 동종 업계에서 1, 2등으로 성장한 기업은 사업 다각화를 위해 이종 업종으로의 진출이 숙명이다. 한두 업종에만 매달려 있을 때 해당 업황이 나빠지면 방법이 없지만, 사업 다각화에 성공하면 위험성은 현격히 감소한다. 더 중요한 건 M&A 이후다. 성공을 위한 단초는 피인수 기업에 동질의 문화를 전파하고 개인과 회사의 성공을 위한 비전을 임직원과 공유하는 것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 영화배우 숀 펜과 인연이 아이티 사업으로 확장된 스토리가 인상 깊다. 전 세계 다양한 사람과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비즈니스로 연결한 비결은 무엇인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 추구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어려운 국가와 국민을 돕는 인류애를 목적으로 형성된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된다.
세아상역은 2011년부터 미국 국무부, 미주개발은행, 아이티 정부와 함께 추진 중인 카라콜 산업단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그곳에서 2만 명을 고용할 수 있는 공장을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기계 설비에 투자하고, 학교를 세웠다. 코로나19 위기 당시 미 연방정부로부터 마스크(2억 장)와 방호복(3000만 벌)을 대량으로 수주할 수 있었던 것도 아이티 재건 사업에 참여한 이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 덕에 2020년 세아상역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팬데믹 이전보다 증가했다.”
사업가로서 롤 모델이 있나.
“젊었을 적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경영 에세이를 감명 깊게 읽었다. 이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기업가의 본분이고, 도전과 창조의 길이 바로 기업가의 길이라고 깨달았다. 최근엔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 한 점을 얻었다.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 豈作蚓猫之態)’ 즉,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기세를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의 자태에 비하겠는가’라는 뜻이다. 유묵이 주는 교훈을 글로벌세아그룹의 표상으로 삼아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으로 정진하고 싶다.”
김환기 작가의 ‘우주’를 132억원에 낙찰받아 ‘세계 2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렸다. 미술 작품을 수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사업 초창기부터 여유 있을 때 한두 점씩 구매하기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김환기 선생이다. 구작도 좋지만, 역시 대표작 ‘우주’를 가장 좋아한다. 사옥 내 자체 갤러리를 운영하고, 무료로 전시회도 열고 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숀 펜과 영화를 제작할 계획도 있다고.
“나는 몽상가다. 앞서 아이티 관련 시나리오를 썼고, 현재는 우크라이나 관련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숀 펜은 과거 내가 아이티 재건 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영화를 제작하면 개런티를 1달러만 받고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다. 언젠가는 영화 제작과 숀 펜의 출연이 이뤄질 것이다.”
경영자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조언한다면.
“직장 생활이든 사업이든 혁신 전략에 목말라하고 끊임없이 용기 있게 도전하라. 도전은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사다리다.”
향후 계획은.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고 싶다. 가나와 탄자니아, 케냐를 수차례 방문했다. 현재 쌍용건설은 아프리카 적도기니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나에게 아프리카는 꿈과 희망의 대륙이다. 사업의 아이템과 기회가 무궁무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