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꿈은 직장인들이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케어 센터(care center)를 만드는 것입니다.” 2014년 오치영 지란지교소프트(이하 지란지교) 창업자(당시 대표)가 6~7명 규모의 직원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꿈은 뭐예요? 내가 도울게요”라고 물었다.
경력직 입사 3년 차였던 박승애 대리의 꿈은 다소 특이했다. 박 대리는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상담해 주는 ‘산업 카운슬러’ 자격증도 있었다. 6년 뒤인 2020년, 지란지교는 그 ‘박 대리’를 각자 대표이사로 발탁해 IT 업계를 놀라게 했다. 그가 보안 솔루션인 ‘오피스키퍼’ 영업에서 성과를 거둬 사업부장까지 단숨에 올랐다는 점을 고려해도 1981년생 여성을 IT 기업 최고경영자로 선임하는 파격 인사였다. 코로나19 창궐이 시작되던 때였다.
‘문송하다(문과라서 죄송하다)’는 시대, 왜 이 기술 기업은 비(非)공학도를 대표로 추대했을까. 4월 박 각자 대표는 창립 30주년을 맞는 지란지교의 단독 대표로 선임될 예정이다. 오 창업자는 1994년 지란지교를 만들고 줄곧 대표로서 회사를 이끌다 2017년부터 후배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현재 그의 직함은 최고드림오피서(CDO·Chief Dream Officer) 겸 지란재팬 대표다.
1994년 설립된 지란지교는 ‘잠들지 않는 시간’ ‘쿨메신저’ ‘스팸스나이퍼’ 등을 만든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다. 29개 계열사 중 보안 전문 기업인 지란지교시큐리티, 에스에스알 두 곳은 코스닥에 상장돼 있다.
지란지교의 판교 신사옥 ‘지란37(성남시 수정구, 2023년 2월 입주)’에서 오 창업자 겸 CDO와 박 대표를 만났다. 1층 로비의 작은 농구장에서 공을 드리블하는 직원과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을 잘 포착한 갑빠오 작가의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사람 문제에 집중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차세대 리더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회사가 박 대표를 주목한 이유는.
오치영 최고드림오피서(이하 오치영) “2014년 당시 박 대리의 답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료에 대해 고민하는 그를 주목한 지 6~7년이 넘었다. 어떤 자리든 리더 역할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란지교 1세대 리더들은 ‘기술쟁이’였다. 차세대 리더는 ‘사람(고객과 직원)’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 리더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가 터져 세대교체도 예상보다 빨리 이뤄졌다.”
박승애 대표(이하 박승애) “사실 대표 자리를 제안받고 놀랐다. 나도 ‘편견 아닌 편견’이 있었다. IT 회사에서는 기술 리더가 회사를 이끌고 나는 그를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딸 걱정에 ‘얌전히’ 회사 다니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셨지만, 남편은 ‘이미 흐름이 왔다. 네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줬다.”
문과생이 개발 프로젝트를 이끄는 방법
박 대표는 2012년 입사 후 정보 유출 방지(DLP·Data Loss Prevention) 솔루션인 ‘오피스키퍼’ 영업을 맡았다. 당시 지란지교의 신제품이었다. DLP 분야 후발 주자였던 지란지교는 곧 중소기업용 DLP 1위 사업자가 됐다. 박 대표는 이 성과를 인정받아 개발·영업 조직을 아우르는 오피스키퍼 사업 부장에 올랐다.
영업 비결이 따로 있나.
박승애 “오피스키퍼는 중소기업용 솔루션이다. 처음엔 고객을 어디서 만나야 할지 막막했다. 이른바 ‘빌딩 타기’와 ‘콜드 메일 보내기’도 여러 차례 했다. 중소기업 대표들이 모이는 협회에도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녹즙 판매원이 눈에 들어왔다. 판매원이 사무실에 녹즙을 자연스럽게 두고 가는 것처럼 우리 제품 소개서도 자연스럽게 잠재 고객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했다.
PC 등 사무기기 렌털로 유명한 한국렌탈을 찾아가 제휴를 맺고 복합기 1위 업체인 제록스와도 협력해 ‘출력물 보안도 중요하다’고 알렸다. ‘전국의 영업 선수들이 우리 제품을 위해 같이 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보자’는 접근 방법이 통했다.”
공대 출신이 아니어서 개발자와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박승애 “영업을 잘하려면 고객에게 약속한 제품을 잘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 보통 영업 사원들은 ‘고객이 너무 힘들게 하니까 제발 나 좀 도와줘’라며 개발자한테 이것저것 부탁한다. 이러면 개발자 입장에서는 동기 부여가 잘 안될 수 있다. 자칫 ‘어쩔 수 없이 해야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고객들이 우리 제품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보는지 적극적으로 피드백해 줬다. 제품을 잘 쓰는 고객만큼 개발자들에게 보람된 일이 있을까. 개발자들이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추가 기능까지 구현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보람을 느꼈다.”
이제 ‘오피스넥스트’다
지란지교라는 사명, 드림오피서라는 직함에서 보듯 오 CDO는 ‘낭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나 보다.
오치영 “하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동희)이 지란지교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우리도 이 이름을 30년이나 쓸 줄 몰랐다. 실제로 사명 변경을 시도한 적도 있다. 이제는 안다.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같이 사귐’이라는 지란지교만큼 좋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좋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향이 난다. 지란의 직원들은 사내외에서 악취를 풍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름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능력만 보고 사람을 뽑아 보기도 했는데, 길게 보면 득보다 실이 많았다.”
박승애 “‘지란지교는 기술 지원을 끝까지 해주잖아요. 다른 곳은 연락도 잘 안 되는데…’라고 말해 주는 고객사를 많이 만났다. 이 기본적인 장점이 후발 제품이었던 오피스키퍼 영업에 큰 원동력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플래그십’급 신제품 ‘오피스넥스트’ 출시를 앞두고 있다.
오치영 “지란지교는 리더뿐만 아니라 제품의 세대교체도 이뤄내고 있다. 오는 3월 공식화되는 오피스넥스트는 메시지, 채팅, 화상 회의 등 커뮤니케이션 기능과 문서 협업 기능을 제공하는 SaaS(Software as a Service·서비스형 소프트웨어)다. 우리가 ‘지란지교 패밀리’라고 부르는 20여 개 계열사의 각종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독할 수 있는 ‘지란 멤버십’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을 넘어 일본 기업용 시장까지 공략하면 승산이 있다.”
박승애 “오피스넥스트는 중소기업의 업무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을 돕는 솔루션이다. 그동안 지란지교가 쌓아온 중소기업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올해 지란지교가 창립 30주년을 맞는 데, 오피스넥스트 출시로 100년 소프트웨어 기업의 초석을 만들고 싶다.”
기자가 사옥 1층 로비에 농구 코트가 있는 건물은 처음 봤다고 하자, 오 CDO가 이렇게 말했다. “농구 로비는 사옥의 심장이다. 농구공 바닥 치기 할 때 나는 ‘쿵쿵’ 소리는 심장 소리와도 같다.”
그는 “창업 후 회사 연간 매출이 100억원이 되는 데 13년, 계열사 모두 합쳐 매출이 약 1000억원이 되는 데 또 12년이 걸렸다”면서 “다음 목표는 2030년까지 월 매출 1000억원의 기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란지교의 첫 제품명(잠들지 않는 시간)처럼 그의 꿈도 잠들지 않는다.
지란지교소프트에 계열사가 많은 이유
지란지교소프트는 계열사와 관계사가 많다. 주로 지란37 건물에 입주해 있는데, 지란지교시큐리티가 4~6층, 모비젠이 7~9층, 지란지교데이터·지란지교컴즈·지란지교테크가 10층, 지란지교소프트가 11층을 사용한다. 2014년 지란시큐리티를 시작으로 지란지교 사업부들이 하나둘씩 분사하고 투자한 스타트업이 늘어나면서 계열사가 많아졌다. 회사 창립 20주년을 계기로 리더십 분산과 차세대 리더 양성 차원에서 단행한 일이었다. 오 CDO는 “핑계 없이 좋아하는 일을 자유롭게 책임지며 일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지란지교 패밀리’로 불리는 지란지교 계열사들은 크게 사업형 지주회사인 지란지교소프트와 그 산하 계열사인 지란지교시큐리티, 에스에스알, 지란지교데이터 그리고 투자형 지주회사인 지란지교챌린지스와 그 산하 계열사인 지란지교테크, 지란재팬 등으로 나뉜다. 2026년을 목표로 지란지교소프트 상장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