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사진 셔터스톡
프랑스혁명. 사진 셔터스톡
1789년 7월 바스티유 습격 사건 이후 프랑스의 무능한 국왕 루이 16세와 그의 방탕한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의 포로가 됐다. 억압적인 구체제(Ancien Régime)가 붕괴했고, 혁명의회를 장악한 계몽주의자들이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프랑스혁명은 정치혁명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경제혁명이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국가 부채 위기

혁명 당시 프랑스는 파산 위기에 몰려 있었다. 루이 14세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실속 없는 대외 전쟁과 방만한 왕실 지출이 만들어낸 과도한 국가 부채가 문제였다.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세간의 이목은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에게 쏠렸다. 네케르는 영국은행을 모방한 프랑스은행의 설립을 제안했다. 프랑스은행이 영국은행처럼 국가 부채를 인수하고 이것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하면, 빠르게 만기가 다가오는 국가 부채 수습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립은행을 국가 부채의 저수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자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양적 완화를 통해 부도 위기에 처한 민간부채를 사들였다. 중앙은행이 악성 채무의 저수지를 자처한 것이다. 위기 시마다 복지부동으로 일관하는 어느 신흥국 중앙은행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네케르의 주장은 의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우선, 지폐에 대한 과거의 불행한 경험이 문제였다. 1720년 존 로는 루이 15세의 승인을 받고 종이돈을 발행하는 국립은행을 설립했다. 짧은 성공 이후 존 로의 시스템은 무너졌고,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만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무엇보다 의회는 화폐 권력을 자본가에게 넘겨주는 것을 꺼려했다. 왕국을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이 은행가라고 믿었던 것이다.

네케르의 의견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미라보 백작이었다. 미라보는 국가가 지폐(paper money)를 발행하면 60년 전 존 로의 계획처럼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눈에 보이는 자산 가치로 담보되는 채권(bond)을 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의회는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압류한 4억리브르(livre) 상당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미라보는 이것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의회는 미라보의 의견을 채택해 아시냐(Assignat·담보부 국채)를 발행했다. 액면가 1000리브르, 금리 5%였다. 1리브르가 은 4.5g이므로 1000리브르는 은 4.5㎏에 해당한다. 은 1㎏을 100만원이라고 치면 액면가가 약 450만원인 셈이다. 아시냐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정부가 아시냐로 국채 원리금을 지급하면, 아시냐는 채권자를 통해 경제계에서 유통될 것이고, 정부가 국유재산을 매각할 경우 사람들은 아시냐를 지불 수단으로 해 국유재산을 매수한다. 아시냐는 국유재산 매각 후 폐기될 예정이었다. 19세기 프랑스인은 이미 ‘부채의 돌려막기’ ‘부채의 화폐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냐는 성공을 거뒀고, 금처럼 신뢰를 얻었다.

프랑스혁명과 당시 발행된 ‘아시냐(Assignat)’.
사진 셔터스톡
프랑스혁명과 당시 발행된 ‘아시냐(Assignat)’. 사진 셔터스톡

재정 적자 위기

그러나 1790년 프랑스는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했다. 극심한 세수 부족이 문제였다. 의회는 다시 머리를 맞댔다. 일부 의원은 은본위제 복귀를 주장했고, 일부 의원은 국유재산 조기 매각을 통한 현금(귀금속) 확보를 주장했다. 하지만 가장 획기적인 대안은 아시냐를 법화(legal tender), 즉 법적 지급수단(화폐)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더 많은 화폐가 유통되지 않으면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미라보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툉의 주교 탈레랑은 미라보의 의견에 반대했다.“현재의 지배적 통화는 은(silver)이다. 종이는 유통하더라도 종이일 뿐이다. 당신(미라보)은 이 종이(아시냐)의 액면가를 고정할 수 있다. 하지만 종이의 반대편에 있는 은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1000리브르의 아시냐를 받고 1000리브르의 은을 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탈레랑은 금속 주화가 아시냐보다 더 가치가 높아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일으키고, 빵 같은 일반 상품의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미라보는 “아시냐를 사용하는 것이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동료 의원들은 논리의 건전함보다 웅변의 강렬함을 선택했다. 재무장관 네케르는 이 결정이 프랑스를 경제적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시냐의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국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았다. 네케르는 장관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망명했다.

인플레이션 위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탈레랑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됐다. 귀금속에 대한 아시냐의 가치가 하락했다. 하지만 의회는 더 많은 아시냐를 발행하며 맞서 싸웠다. 1791년 루이 16세가 해외로 도피한 후 반혁명을 선동하려다가 국경 근처인 바렌느에서 체포됐다. 이 사건은 혁명정부가 보장하는 아시냐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켰다. 1791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이 전쟁을 선포하자, 아시냐 가치는 액면가의 절반 이하로 하락했다. 하지만 전쟁은 군인들을 먹이고 장비를 사는 데 더 많은 돈을 써야 하고, 더 많은 아시냐를 유통해야 함을 의미했다.

1791년에서 1795년 사이에 발행된 모든 지폐에는 ‘국유재산으로 담보함’이라는 문구가 인쇄됐다. 이것은 아시냐가 발행될 때마다 더 많은 국유재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의 재산이 압류됐고, 그다음에는 그 친척들의 재산이 압류됐다. 1794년 프랑스 군대가 벨기에를 점령하자, 벨기에 귀족과 성직자들의 재산이 압류됐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새로운 공화국은 1793년까지 37억리브르(1경6550조원)에 달하는 아시냐를 유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가 전장에서 더 많은 적을 물리칠수록, 프랑스 국민은 더 강한 인플레이션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의회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했다. 우선, 루이 16세 초상이 그려진 모든 지폐를 폐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공화국 정부가 발행한 아시냐에 비해 루이 16세가 발행한 아시냐 가치가 높아지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희소성의 원칙’이 발현한 것이다. 이후, 의회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주화(귀금속)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다. 1793년 공포정치가 본격화되자 로베스피에르는 시민에게 혁명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금속 주화를 아시냐와 교환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귀금속을 숨겼기 때문에 이 조치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공안위원회는 가격 상한법을 제정해 빵과 밀가루에 대한 가격을 통제하려 했다. 가격을 조작하거나 물건을 매점매석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혁명의 적’으로 분류돼 공개 처형당했다. 그러나 가격 상한제가 도입되자 식량의 공급이 줄어들었고 도시민은 더 굶주리게 됐다. ‘정부의 실패’가 발생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승리

1793년 영국 정부는 프랑스를 무력화하기 위해 수백만 장의 아시냐를 위조해 프랑스 전역에 유통시켰다. 하지만 혁명정부는 아시냐를 사용해야만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혁명군은 연합군에 대해 놀라운 승리를 이어갔고, 용감한 군인들의 약탈은 프랑스의 국고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됐다. 새로운 부(귀금속)의 유입으로 인해 지폐 가치 하락은 덜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전쟁의 승리로 인해 타국에서 약탈해 온 금과 은이 넘쳐났기 때문에, 통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유재산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1799년 쿠데타로 총재 정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금이나 은의 가치로 뒷받침되지 않는 모든 통화에 반대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의 화폐인 프랑(금화·은화)을 재도입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의 화폐 단위를 혁명의 이념이 담긴 ‘십진법’으로 재정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