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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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갈 수 없다면, 주식 투자라도 ‘탈조선’ 하자” 같은 자조 섞인 하소연이 국내 주식 투자자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2020년 코로나19 충격 이후 물밀듯이 증시에 유입했던 투자자의 한국 증시 탈출이다. 한국 증시는 참 어렵다. 긴 호흡으로 좋은 기업을 찾아내, 주식을 들고 가면 되는 ‘매수 후 보유 전략’이 유독 한국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용어는 주주 가치가 무시받고, 오너 가치가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실망이 커지다 보니, 이제 ‘장기 투자자는 미국으로, 테마 투자자만 한국에서’라는 슬픈 현실이 자리 잡혀가고 있다고 본다.

물론 한국과 미국은 기업 자체가 다르다. 혁신 성장을 이끄는 기업들이 촘촘하게 자리 잡힌 미국 증시는 여전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의 한국 증시와 차이가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국과 미국의 PBR(주가순자산비율) 간격은 지나치다. 2009년 이후 한국의 PBR은 하락하고, 미국의 PBR은 상승하다 보니, 이제 미국 PBR(4.72)은 한국 PBR(0.93)의 5배에 달한다. 심지어 장기 불황에서 이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 PBR(1.41)은 물론,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만 PBR(2.14)에도 한참 못 미친다.

1월 24일 정부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책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다양한 정책 제안이 알려지며 2월 전반 증시를 뜨겁게 달군 이슈가 됐다. 앞서 유사한 정책을 실현했던 일본 증시도 약진했기 때문이다. 2023년 3월 도쿄 증권거래소가 내놓은 정책은 ‘PBR 1 미만인 회사는 개선안 제출, 이후 이행 목표를 달성 못 하면 2025년 3월 상장폐지 처분도 할 수 있다’는 엄포였다. 한국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강제 조항보다 세제 인센티브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
전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전 한화증권 
투자분석 팀장, ‘주식의 시대, 투자의 자세’ 저자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
전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전 한화증권 투자분석 팀장, ‘주식의 시대, 투자의 자세’ 저자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 

덩치(순자산)만 크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체구에 날렵한 이가 싸움을 잘한다. 과거의 저(低)PBR 장세는 덩치만 봤을 뿐 시장을 이겨낼 싸움꾼을 잘 골라내지 못했다. 한국 증시가 지닌 할인 요인은 ‘PBR=시가총액/순자산’에서 ‘순자산’에 있다. 순자산은 총자산과 총부채 사이의 차이다. 순자산은 두 가지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돈을 만드는 자산인지가 첫째다. 워런 버핏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은 청산 가치로서 PBR을 제시했다. 물건을 만들어 팔기 위한 설비나 땅이 필요하고, 설령 기업이 파산해도 자산 가치 대비 할인해 주식을 사놓았다면, 손해 보지 않을 거란 사고에 기초한다. 수익성보다는 안정성을 담보하는 장치로서 PBR을 활용했다.

하지만 그레이엄의 계승자인 워런 버핏은 어떤 자산인지가 더 중요했다. 덩치보다 날렵한 체구 그리고 남을 압도할 무기(경제적 해자)를 지니고 있는지에 더 집중했다. 버핏이 애플 투자에 나섰을 때, 애플의 PBR은 10배에 달했다. 단순히 청산 가치가 아닌 이익과 매출 성장의 과실을 함께하는 ROE(자기자본이익률) 상승에 올라타는 자산 가치에 중점을 둔 투자다. 기업의 유형자산은 기업 성장의 유일한 바로미터가 아니다. 오히려 플랫폼과 테크의 시대, 자산 평가의 핵심은 미래 이익을 끌어내는 무형자산에 있다.

한국의 저PBR 장세가 지속되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 순자산의 의미는 부동산이나 오래된 설비에 기반한 가치다. 부풀려진 자산이 담보로 쓰여왔다면, 청산 시 순자산은 숫자에 크게 못 미칠 수 있다. 장부에만 적혀 있는 무수익 자산이 아닌 수익을 창출하는 자산, 나아가 경제적 해자를 만들어낼 무형자산 가치가 늘어날 때, 한국 증시는 저PBR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대의 시각도 흥미롭다. 순자산의 과소평가 가능성이다. 한국의 최고 상속세율은 표면적으로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2위지만, 사실상 1위다. 최대 주주 주식 할증까지 감안하면 60%로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OECD 평균은 15%에 불과하다. 상속 시에 주식 평가 방식은 상장 주식의 경우 시가다. 오너 입장에서는 장부가보다 낮은 주가를 유지해야 상속 시 유리하다. 굳이 높은 주가를 원하지도 않는다. 지분을 넘길 때, 비용 부담을 피하고 싶어서다. 그러다 보니, 상속과 증여에 관련된 기업은 자산 가치를 낮게 유지하려 한다. 부동산 가치도 낮게 유지하려다 보니, 자산 재평가도 하지 않는다. 저PBR이 고착화된 기업이 꽤 많은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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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E 중시 경영 정착돼야

이처럼 자산 가치와 실제 가치의 괴리도 고민거리지만, 과거 한국 증시가 걸어온 길을 떠올리면 더더욱 고민은 커진다. 한국 증시는 주주 이익을 우선하기보다 기업 자금 조달의 창구로서 기능이 훨씬 더 컸다. 이렇듯 한국 증시에서 PBR이 주가 변동을 온전히 반영하지 않다 보니, 주가가 횡보할 때도 PBR이 낮아지고, 주가가 오를 때도 PBR은 주가만큼 올라서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낮아진 ROE 영향이 크다. 분모의 순자산은 늘어나는데 분자의 이익은 상대적으로 늘어나지 못했다.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을 주주에게 환원하지 않고 회사에 쌓아두거나 재투자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자금 조달 창구가 아닌 주주 가치가 우선시되는 증시로 재편해야 한다. 2012년 2022년까지 한국의 평균 주주 환원율은 29%에 불과하다. 배당과 자사주 소각에 인색하다는 것인데, 미국처럼 주주 중시 경영이 정착돼 배당 지급, 자사주 매입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에도 못 미친다는 게 충격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밸류업 프로그램이 이러한 구조를 바꿔 놓기를 기대한다. ROE 중시 경영의 정착도 중요하다. PBR은 ROE의 함수이고, 결국 기업이 자산으로 돈을 잘 벌거나 아니면 순자산을 줄이거나 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ROE가 올라서고, 이를 반영하며 PBR이 상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2월 말 발표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PBR뿐만 아니라 ROE 개선안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본의 부양책에 포함된 상장폐지 같은 강력한 페널티는 포함돼 있지 않다. 이렇게 되면 ROE를 높이기 위한 경영진과 오너들의 결단이 더욱 중요하다. 이익을 늘리는 것은 환경에 지배되지만, 주주 환원율을 높이기 위한 결정은 의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세제 개혁도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한국 기업들의 지배주주 입장에서 배당을 늘릴 요인이 크지 않다. 종합소득세 때문인데, 배당소득에 대해 분리과세를 적용하거나 배당소득세 자체를 낮춰야 배당 성향이 올라갈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상속세 조정도 당연히 글로벌 평균 수준으로 회귀해야 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벗어날지, 아니면 박스피의 저주에 갇히게 될지 기로에 서 있다. 한국 증시를 떠난 투자자들을 되돌리려면 미국을 생각하면 된다. 기업은 주주가 준 자본으로 돈을 많이 벌고, 번 돈은 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주주에게 돌려준다. 기업이 돈을 쟁여놓기보다 번 돈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거란 믿음이 있기에 주가 변동성에도 흔들리지 않고 장기 투자자의 길을 선택한다. 한국 증시의 PBR이 1배 미만에 있지만, 미국 증시는 5배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답을 알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제는 변할 수 있을까. 지배구조 개선, 오너 가치와 주주 가치 분리가 시급하다. 그러면 성장성 대비 밸류에이션이 낮고, 주주 환원이 자리 잡힌 기업들, 예를 들어 시가총액 대비 현금이 많은 기업, 높은 배당 성향을 유지해 온 기업, ROE가 지속 상승하는 기업 등이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한국 투자자들은 긴 호흡으로 이러한 기업들을 찾아내 주식을 들고 가면 된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지만, 확신하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아직 미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