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경제학, 프랑스 ESSEC 비즈니스 스쿨 경제학 박사, 전 국제노동기구(ILO) 조사국 컨설턴트 사진 한국은행
책 ‘사피엔스’ 저자이자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는 2018년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어떤 노동 분야도 인공지능(AI)과 자동화에서 100% 안전할 수 없다” 며 “데이터를 분석해 진단하고 치료법을 제시하는 의사를 AI로 대체하기는 쉽다. 그러나 약물을 주입하고 붕대를 갈아주는 간호사를 대체하기는 훨씬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2023년 11월 발간한 ‘AI와 노동시장 변화’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보고서에서 국내 일자리 중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큰 일자리가 약 341만 개에 달한다며, 특히 의사·회계사·변호사 등 소위 고소득 전문직을 대체 위험이 큰 직업으로 꼽았다. 보고서를 작성한 오삼일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분석팀장을 2월 21일 만났다. 오 팀장은 “대용량 머신러닝(기계학습)이 가능한 AI는 비반복적이고 인지적(분석)인 일까지 대체할 수 있다”며 “통상 고학력·고소득 근로자에 해당하는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이들 직업군이 AI 숙련도를 높이고 이를 잘 활용해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하면 더 높은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면서 이와 함께 소프트 스킬(정량화하기 어려운 정서적인 능력)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블루칼라의 임금 수준이 개선되고 있고, 화이트칼라와 임금 격차가 줄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어떤 상황이며,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주요인은 뭘까.
“블루칼라가 저임금 일자리를 통칭한다는 전제 아래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미국은 최근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에 임금이 상당히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부터 이민자를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여기에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물리적으로 이민자 유입 자체가 제한되다 보니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를 채워주던 외국인 근로자가 급감하며 인력난이 생겼다. 결국 임금은 자연스럽게 올랐고, 이에 따라 물가도 많이 올랐다. 한국은 조금 다른 추이가 있다. 저임금 서비스업 임금 상승률이 높지는 않다. 대신 인력난이 심한 제조업에서는 임금 상승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기술 발전의 영향도 있다. 지금은 AI를 많이 얘기하지만, 과거 기술이라고 하면 로봇과 소프트웨어를 말했다. 연구 결과, 이 기술들은 지난 20~30년 동안 중간 숙련 근로자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설비 라인 생산직을 비롯해 서비스직 중 계산원, 행원 같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일자리들이 상당히 대체됐다. 대신 기계가 하기 힘든 일자리, 즉 아주 고급 기술이 필요한 일이나 사람이 몸으로밖에 할 수없는 일자리들은 늘어났다. 결국 중간 숙련 일자리는 줄어들고 양극단의 일자리 비중이 높아지는 일자리 양극화가 나타났다.”
보고서에서 언급했듯 생성 AI 같은 급속히 발전한 AI 기술이 화이트칼라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데. AI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직업의 특성은 뭔가.
“보통 일자리를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하는데, 반복적·비반복적이냐 그리고 인지적(cognitive)이냐, 육체적 노동(manual)이냐다. 로봇이나 소프트웨어 같은 기존의 기술들은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일들을 주로 대체했는데, AI는 비반복적이고 인지적(분석)인 일까지 대체할 수 있다. 대용량 기계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일자리로는 대부분 현재 고학력·고소득 근로자의 일자리, 즉 화이트칼라의 직무가 많다.”
이는 기존 산업계나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수익을 많이 내거나 비용을 줄여야 한다. 노동력과 관련해서는 결국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AI가 비용과 생산성 측면에서 효율성이 더 좋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AI에 투자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당연히 AI로 인해 대체되는 일자리가 생길 것이고, 기업의 노동 수요 자체도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노동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AI로 인해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직업을 꼽으면.
“현재 AI 기술로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해당 직업의 업무에 얼마나 집중돼 있는지를 나타내는 직업별 AI 노출 지수를 분석한 결과, 의사(일반 의사, 한의사, 전문 의사)가 상위 1%로 최상위권에 들었고, 회계사, 자산운용사 매니저, 변호사 등도 상위권에 해당했다. 통상 고학력·고소득 근로자에 해당하는 일자리다. 이런 일들은 비반복적·인지적 특성을 갖는데, AI는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의 주업무 중 하나는 병을 진단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엑스레이를 찍고 판독할 때 이미지 센서와 엄청난 데이터를 보유한 AI가 더 효율적이고 정확도가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영향을 덜 받거나 수요가 높아지는 직업은.
“반면 기자, 성직자, 대학교수, 가수·성악가, 점성술사 등이 AI 노출 지수가 낮았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대면 접촉과 관계 형성이 필수적인 분야다. 이 중 기자가 AI 노출 지수가 낮은 것은 단순 보도와 달리 탐사 보도 등이 대면 취재를 통해 이뤄지고, 취재원과 관계 형성을 통해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는 특징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학교수의 경우 이미 존재하는 지식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내는 일이라는 특성이 반영된 것 같다. 또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례로 AI 기술을 개발·유지하는 고생산성 일자리와 AI 관련 스타트업이 늘어나고 있다.”
AI 기술 이외에 블루칼라 직종의 부상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이 있을까.
“저출산·고령화로 인구가 줄어든 영향도 크다. 인구가 감소하면서 절대 노동 공급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득과 교육 수준은 높아진 사람들이 굳이 선택하지않는 직업은 인력난이 심화하고, 결국 이는 가격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이런 일자리들을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하려고도 하지만, 100% 가능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이런 격변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경쟁력을 갖춰야 할까.
“당장은 AI가 화이트칼라를 더 많이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많지만, 실제 20년 후 상황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는 결국 AI를 잘 활용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이들이 오히려 화이트칼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큰 직업으로 꼽힌 의사, 회계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근로자 역시 AI 기술 활용 여부와 숙련도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본다. AI를 잘 활용해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하면 더 높은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AI 시대, 테크의 시대, 코딩의 시대인 만큼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기술에 대한 수요는 견고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시에 소프트 스킬에 대한 수요도 큰 폭 늘어날 것이다. 소프트 스킬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조율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다. AI는 반복적 업무뿐만 아니라 기존 기술로는 한계가 있는 인지적 업무까지 대체할 수 있기에 사회적 기술, 팀워크 능력, 의사소통 능력 같은 소프트 스킬이 앞으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