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주식시장에서 놀라운 수익을 기대하지 말라. 하지만 기회는 있다. 증시 패닉은 언젠가 온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막대한 자금 등 시장 급락에 대응할 능력이 있어,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94)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2월 24일(이하 현지시각) 연례 주주 서한에서 강조한 메시지다. 현재 주식시장에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없어 앞으로 투자 성과에 대한 주주의 기대치를 낮추는 한편, 다가올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를 위해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가 역대 최대 현금 보유액 1676억달러(약 223조원)를 쏟아부을 준비도 됐다고 했다. 버핏은 또한 현 주식시장이 단기 투자가 성행하는 등 하루아침에 대박이 나는 ‘카지노’처럼 변했다고 경고했다.
증시, 투자할 곳 없고 카지노로 변질
버핏은 이날 주주 서한에서 가장 먼저 더 이상 투자처가 마땅치 않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미국 내 버크셔 해서웨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기업이 거의 없고, 이 기업들은 이미 우리나 다른 투자자로부터 끊임없이 선택받았다”며 “미국 외 지역에 투자할 만한 옵션이 될 후보가 사실상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버크셔 해서웨이가 눈에 띄는 성과를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면서 “앞으로 변하지 않을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 원칙 중 하나는 원금 손실 가능성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버핏은 또한 주식시장이 도박판처럼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식시장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훨씬 더 카지노 같은 행태를 나타내고 있다”며 “시장이 과거에 비해 더 커졌지만, 시장 참여자들은 내가 학교에 다닐 때보다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지도 않았고 더 잘 배운 것도 아니다”고 했다. 하루아침 대박을 노리고 카지노를 찾는 도박꾼처럼 주식시장에도 단기간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투기꾼이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버핏은 그동안 투자하는 기업의 가치는 신경 쓰지 않고 단지 돈만 추구하는 투기꾼이 주식시71장에 늘고 있는 것을 우려해 왔다. 투기꾼은 투자하기 가장 적합한 기업을 찾기 위해 기업 보고서 등을 파헤치는 대신 단순히 유행하는 주식을 구매하고, 며칠 뒤 심지어 몇 시간 뒤 누군가에게 더 많은 금액에 팔기를 바란다.
다만 버핏은 투자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내놨다. 그는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증시 폭락, 2001년 IT 버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등의 증시 대공황을 언급하며 “주식시장에 이런 패닉이 자주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발생하긴 한다” 며 “버크셔 해서웨이는 막대한 자금과 확실한 성과 등 시장 급락에 대응할 능력이 있어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특히 버핏은 “(역대 최대 현금 보유액) 1676억달러를 쏟아부을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버크셔 해서웨이가 발표한 2023년 4분기 실적 보고서를 보면, 현금 보유액은 1676억달러로, 전 분기 말 수준(1572억달러)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실적도 나쁘지 않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2023년 4분기 영업이익은 84억8100만달러(약 11조2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28% 증가했다.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은 373억5000만달러(약 49조7000억원)로, 전년보다 21% 증가했다. 주요 투자 부문인 보험업이 금리 상승에 더해 미국의 비교적 온화했던 날씨 덕에 큰 수익을 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버핏, 日 침체기 종합상사 투자해 수익 극대화
버핏은 미쓰비시상사·미쓰이물산·이토추상사·스미토모상사·마루베니 등 일본 5대 종합상사 투자를 예로 들었다. 그는 일본 5대 종합상사 지분을 각각 9% 정도 보유하고 있다면서, 2023년 말 기준 해당 투자에 따른 미실현 이익이 80억달러(약 10조6000억원)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앞서 버크셔 해서웨이는 2020년 8월 말 이 회사들 지분을 각각 5%가량 취득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올해 일본 증시 랠리를 고려하면 이익 규모는 더 커졌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금융 정보 업체 팩트세트에 따르면, 2월 22일 기준 버크셔 해서웨이가 보유한 일본 5대 종합상사 지분의 평가 가치는 230억달러(약 30조6000억원)에 이른다.
버핏이 일본 5대 종합상사에 대한 투자를 늘린 2020년은 일본 증시가 침체기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2020년 8월 당시 닛케이225지수는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 12월 29일과 비교하면 40% 낮은 수준이었다. 현재 닛케이지수는 연일 신고가 행진을 벌이고 있다. 버핏은 일본 종합상사 투자와 관련, “매우 인내심이 필요했고 (장기간 매수로) 우호적인 가격 시기가 길어졌다. 전함이 방향을 바꾸는 것 같은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주식시장에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없다고 판단한 버핏은 자사주 매입도 지속했다. 그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자사주 매입은 주주에게 이익이 된다”고 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난해 4분기 자사주 매입에 약 22억달러(약 2조9000억원)를 지출했고, 지난해 자사주 매입 총액은 약 92억달러(약 12조2000억원)에 달했다.
후계자 그레그 에이벌 부회장 평가도
버핏은 주주 서한에 후계자인 그레그 에이벌(60) 부회장에 대한 평가도 밝혔다. 그는 “에이벌은 모든 면에서 미래 버크셔 해서웨이 CEO가 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5월 4일 열리는 버크셔 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에이벌 부회장, 아지트 자인(73) 부회장과 함께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에이벌 부회장은 2018년부터 버크셔 해서웨이 비보험 부문 사업을 모두 맡고 있고, 자인 부회장은 보험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버핏은 2023년 주주 서한에서 “아직 컨디션이 좋지만, 내가 연장전을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버핏의 추모 “멍거는 위대한 기업의 설계자, 나는 시공업자”
워런 버핏은 2월 24일 주주 서한에서 지난해 11월 별세한 ‘영혼의 파트너’ 찰리 멍거(99) 전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버핏은 “찰리가 지금의 회사를 있게 한 설계사였다면, 나는 그의 비전에 따라 공사한 시공사다”고 했다.
버핏은 멍거가 1965년 자신에게 “괜찮은 기업을 멋진 가격에 사는 것을 포기하고 멋진 기업을 괜찮은 가격에 사는 것”을 추천했으며, 자신이 결국 멍거의 지침을 따랐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현 버크셔 해서웨이 성장의 공은 영원히 찰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버핏은 또한 “멍거는 내게 형님이었고, 다정한 아버지였다”며 “멍거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조차 내게 주도권을 줬으며, 내가 실수했을 때도 절대, 결코 내 실수를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위대한 건축물은 설계사와 연결되고, 콘크리트를 붓고 창문을 설치한 사람은 잊힌다”며 “버크셔 해서웨이는 위대한 기업이 됐고, 멍거는 영원히 설계사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추모했다.
한편 버핏은 그간 멍거를 ‘가치 투자’의 창시자로 묘사해 왔다. 가치 투자란 가치 있는 주식을 발굴해 장기적으로 보유하라는 말이다. 변호사 출신인 멍거는 1965년 전문 투자자의 길로 들어섰고, 1976년 버크셔 해서웨이에 본격 합류해 1978년 부회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