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고 했던가. 34년 만에 대호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 증시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모든 주식의 시가총액이 연초 중국 상하이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을 넘어서며 전 세계 주식시장 4위를 탈환했다. 외국인 투자자의 매수세가 꺾이지 않는 가운데, 3월 초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 지수)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증시 랠리에는 엔저와 미·중 갈등, 중국 경기 침체 등 우호적인 외부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우선 엔화 약세가 큰 몫을 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조기 금리 인하 전망이 후퇴하면서 엔화가 유독 약세 흐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글로벌 투자자에게 일본 증시는 투자 매력이 높다. 한편 주가 상승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보면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한 반사 이익으로 인해 연이은 실적 호조를 보이고 있다. 반면 중국 경제가 2023년 5월 이후 대내외 수요 위축, 부동산 시장 침체 등으로 하락세를 지속해 오자 중국으로부터 이탈한 자금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효과도 있었다.

외부 호재가 많았지만, 이번 일본 증시 랠리에서 전 세계 투자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동안 일본이 자본시장을 구조적으로 개혁시켜 온 노력이 빛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2023년 3월 시행된 ‘밸류업(value- up·가치 상승)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기업 가치 제고를 목표로 한 3단계 정책이 주요 골자다. 우선 상장 기업을 세 개 시장으로 개편해 시장 간소화를 통한 접근성 확대를 꾀했고, 다음 단계로는 PBR(Price to Book Ratio·주가순자산비율)이 1배 이하인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주가 및 자본비용을 경영에 감안하도록 촉구했으며, 이후 실천 여부를 모니터링하고자 기업 가치 제고 노력 현황을 기재한 기업명단을 매월 공표했다.

만성적인 저평가 척도로 주로 쓰이는 PBR은 기업의 시가총액을 순자산으로 나누어서 산출한다. 즉 현재의 주가가 순자산에 비해 몇 배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지를 통해서 주가와 장부 가치를 비교할 수 있다. PBR이 1배인 종목은 해당 종목의 단위 주가가 1주당 장부 가치와 같다는 뜻이며, 1배 미만인 종목은 주가가 장부 가치보다 낮기 때문에 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회사가 청산된다면 주주가 받을 자산 가치보다 현재 주가가 더 낮다는 뜻으로, 기업의 주가가 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가격을 달성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장 기업의 PBR을 높이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현 주가에 기업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면 투자 매력이 떨어져서 국내외 투자자를 불러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단기적인 주가 부양을 넘어서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장 질서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확립하는 것은 기업을 혁신하고 자본시장을 개혁하는 효과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들이 가진 일반 주주에 대한 의식 및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시장 질서를 확립하는 등 근본적으로 자본시장의 체질이 개선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엄여진 부국캐피탈 PE금융팀장 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 바이오 애널리스트
엄여진 부국캐피탈 PE금융팀장
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 바이오 애널리스트

日과 다른 韓 밸류업 프로그램

국내에서도 1월 24일 금융 당국이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여 상장사 기업 가치 제고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하자 국내 증시는 대표적인 저PBR 종목의 주가가 일제히 상승하며 화답했다. 그러나 막상 금융 당국이 2월 29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운용 방안을 발표하자 시장은 관망세로 돌아선 걸로 보인다. 저PBR 기업의 주가가 들썩이긴 했으나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의성공 사례를 적용해 보면 그 파급력은 아직 제한적인 수준이다.

그 이유는 현재 발표된 방안이 강제성 없이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업 가치를 제고하도록 장려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요건 미충족 시 상장폐지도 가능하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반면 국내 밸류업 방안은 상장 기업들이 스스로 현황 진단, 목표 설정, 계획 수립, 이행 소통 등을 통해 투자자와 소통하여 가치 개선을 주도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향후 관련된 제도 등이 개편되어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으나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밸류업 프로그램이 효과를 보려면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하기에 시장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장기간에 걸쳐서 시행된 종합 정책 중 극히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아베노믹스 이래로 10년간 실행해 왔다.

구체적으로 2014년부터 일본은 ROE(Re-turn On Equity·자기자본이익률) 제고 등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일본 공적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적극적 의결권 행사)’를 도입해 2015년부터 도쿄증권거래소에 의해 기업 지배구조 공시 또한 의무화됐다. 2022년 4월 도쿄증권거래소는 상장 시장을 대기업 위주의 ‘프라임(prime)’, 중견기업 위주의 ‘스탠더드(standard)’, 신흥 기업 자금 조달용으로 ‘그로스(growth)’로 재편했다. 이 중 프라임 시장에는 해외 투자자가 요구하는 수준의 공시 기준 등을 도입했다. 시장에서 흔히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정책은 이러한 여건이 갖춰진 후에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본 닛케이 지수가 사상 처음 4만 선을 돌파한 3월 4일 서울 중구 명동 하나은행 딜링룸에 닛케이 지수가 표시돼 있다. 사진 뉴스1
일본 닛케이 지수가 사상 처음 4만 선을 돌파한 3월 4일 서울 중구 명동 하나은행 딜링룸에 닛케이 지수가 표시돼 있다. 사진 뉴스1

기업 장기적 성장을 꾀하는 게 목표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추진이 필요하다. 따라서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단기적인 주가 부양을 기대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는 기업의 무형자산 투자를 장려해서 기업이 장기적 성장을 꾀하는 것이다. 무형자산으로는 인적 자본과 연구개발(R&D), 영업권, 산업 재산권, 고객 만족도, 브랜드 가치 등이 있는데 기업이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형자산 투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국내 증시는 이미 2000년대부터 저평가에 대한 논란이 늘 있어 왔으나 최근 국내에서 밸류업 프로그램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 의미가 크다. 취지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 문제와 가계 부채 증가, 기업 투자 위축 등 저성장 기조를 해결할 돌파구로서 자본시장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자본시장이 ‘기업과 투자자가 상생하는 기회의 사다리’로서 역할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본시장의 체질부터 개선돼야 한다. 제도 수립도 중요하지만 기업들이 가진 일반 주주에 대한 의식 및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시장 질서를 지키려는 실천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투자자들도 변해야 한다. 장기적인 기업 가치 상승에 관심을 두고 이에 근거한 투자 판단을 하자. 기관 투자자라면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투자 대상 기업의 장기적인 기업 가치 제고를 추구할 수 있다. 기업 가치 제고를 바라는 투자자의 매서운 기준이 자본시장을 개혁할 가장 큰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