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다. 아버지가 된 남자와 아버지가 되지 못한 남자. 자식이 있다고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니다. 자식이 없다고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을 낳고도 남보다 못한 아버지가 있고 자식이 없어도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가슴을 가진 남자도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아들의 아버지와 딸의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못다 이룬 꿈을 완성해 주길 소망한다. 인생이라는 전쟁에서 아들이 성공적으로 살아남기를 기도하며 엄하게 가르치고 훈련한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고 노여워한다. 가혹한 사자처럼 무리에서 새끼를 내쫓고, 매정한 독수리처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삶이라는 전투에서 함께 싸울 전우이기 때문이다.

영화 ‘테이큰’. 사진IMDB
영화 ‘테이큰’. 사진IMDB

아버지에게 딸은 언제까지나 꼬마 아가씨, 쥐면 부서질까, 만지면 깨질까, 보기만 해도 닳아 사라질까 두려운 보물이다. 사내의 속성을 잘 아는 아버지 눈에 세상 남자는 딸을 훔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다. 딸아이가 그런 녀석의 품에 안긴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도 막상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다 자란 딸이 데려와 인사시키면 잘 부탁한다고, 젊은 늑대에게 딸의 손을 건네고는 남몰래 눈물 흘린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전직 특수요원 브라이언에게도 딸아이 킴은 목숨보다 귀한 보물,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보석이다. 그는 어느덧 자라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딸에게 줄 선물을 안고 아내의 새 남편이 마련해준 성대한 파티에 참석한다. 브라이언은 선물이 마음에 든다며 품에 안기는 딸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러나 새아버지가 준비한 엄청난 선물을 보자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서운하지 않다고 마음을 다독여도 덩그러니 남겨진 초라한 선물처럼,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영화 ‘테이큰’. 사진IMDB
영화 ‘테이큰’. 사진IMDB

아무리 부정해도 킴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건 딸기 밀크셰이크도 아니고 아빠와 손잡고 놀이동산에 가는 것도 아니다. 킴이 원하는 건 부모의 잔소리와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 잘생긴 사내아이들의 시선과 달콤한 키스, 장난감 마이크를 쥐고 거울 앞에서 가수 흉내를 내는 대신 유명 그룹의 열혈 팬이 되어 콘서트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또래와 떠나는 유럽 여행.

친구와 프랑스에 가는 걸 허락해 주지 않는다고 울며 뛰쳐나가는 딸을 보며 브라이언은 갈등한다. 햇빛만 보며 자란 딸에게 세상은 동화 속 궁전이지만 사회의 뒷면,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어둠의 세계를 너무 많이 경험한 브라이언에게 세상은 악인들의 놀이터, 한 발만 잘못 디디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이다. 방심하면 누구라도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브라이언은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딸 바보 아빠의 노파심이 딸의 행복을 가로막는 건 아닐까, 브라이언은 마지못해 허락한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불행을 불러온 것일까. 브라이언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킴의 설렘은 악몽으로 바뀐다. 킴은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된다. 국제 경찰의 협조를 받기엔 시간이 없다. 실종 후 사나흘 안에 구출하지 못하면 영영 찾을 길이 없다는 게 인신매매 범죄의 가장 끔찍한 함정이다. 브라이언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혈혈단신 파리로 날아간다. 인간으로 태어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사람을 사고파는 것이고, 사내로 태어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여자와 아이를 팔아먹고사는 것이다. 얼마나 못났으면 아이와 여자를 괴롭혀 생계를 꾸리고 부를 누릴까. 

딸의 납치범을 찾아 응징하는 것이 아버지 브라이언의 양심과 정의다. 자식의 생명과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지 않은 악인에겐 연민과 용서, 타협과 협상은 가당치도 않다. 그래서 브라이언의 액션엔 1초의 망설임도 없다. 딸이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의지를 담은 주먹 한 방에 악당들은 지푸라기처럼 쓰러진다. 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내갈기는 타격은 치명적이고 적이 방아쇠를 당길 겨를도 주지 않는 재빠른 사격은 백발백중이다. 딸을 되찾는 데 방해가 된다면 자유의여신상이든 에펠탑이든 부숴버릴 것이다. 브라이언은 납치범들을 쓰러뜨리며 딸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선다. 딸을 납치한 인신매매 조직을 전직 특수요원 아버지가 통쾌하게 혼쭐내는 ‘테이큰’은 2008년에 나온 오락 액션 영화지만, 현실 속 인신매매 범죄는 훨씬 더 심각하다. 통계에 따르면 영화가 나왔던 2010년을 전후해서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이던 피해 규모는 최근 4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성 착취 목적으로 납치되는 여성과 아이들이다.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부모에게 자식만큼 귀한 게 또 있을까. 영화 ‘테이큰’은 ‘내 새끼’를 위협하는 적을 기생충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며 무자비하게 징벌하지만, 타인을 짓밟아 자기 배를 불린 범죄자도 누군가에겐 귀한 자식이라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2012년에 나온 후속작에서는 브라이언이 딸을 구하는 과정에서 해치운 인신매매 조직원의 아버지가 복수에 나선다.

“당신 아들은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서 사창가에 판 나쁜 놈”이었다고 브라이언이 말하지만 “내 아들이 무슨 짓을 했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라며 늙은 아버지는 칼을 빼 든다. 그러나 부모의 슬픔이 크다고 해서 자식이 저지른 범죄와 죄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피해자 부모와 가해자 부모의 슬픔과 상실감을 똑같은 저울 위에 놓을 수는 없다고 ‘테이큰 2’는 말한다.

“아빠가 왔어. 아빠가 날 구하러 왔어.” 마침내 브라이언의 품에 안긴 딸이 외친다. 공주를 구하는 영웅 이야기의 원형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모든 아버지가 브라이언처럼 강하진 않지만, 어떤 왕자도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버지처럼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공주를 영원히 사랑할 수는 없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문득 그리워지는 건 말없이 안아주는 아버지의 크고 따뜻한 품이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낸 게 사실이라면, 모든 딸에게 왕자를 줄 수 없어서 신은 아버지를 보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