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미국 실리콘밸리 초기 스타트업들이 본인들 사업 아이템에 대해 발표하는 ‘데모데이’에 나가면 30개 스타트업 중 27개는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이다. 그중 20개 정도는 기업 고객용 B2B(기업 대 기업) SaaS(Software as a Service·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이다. B2C(기업 대 고객) AI 스타트업 비중이 적은 것을 보면 아직은 소비자 개인보다 기업에서 AI 도입이 절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3월 초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떠오르는 AI 전문 초기 투자사 인셉션 스튜디오(Incep-tion Studio)의 창업자 존 웨일리를 만났다. 존은 한 번의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 경험이 있는 연쇄 창업자이자 11년째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겸임교수다. 박사과정 당시 스탠퍼드대 최고의 논문을 냈던 연구자이기도 하고, 어릴 적 미국 내 최고의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었던 세계 톱 엔지니어 출신 투자자가 바로 존이다. 최근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프로그래머가 앞으로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존과 나눴다.

현 퓨처플레이 벤처파트너
앞으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가.
“AI 스타트업에만 투자하고 있고 지금도 코딩을 하는 입장에서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요즘에 AI가 해준 코딩을 복사·붙여넣기 해서 프로그램이 왜 작동하는지도 모른 채 프로그래밍하는 엔지니어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 실력을 갖춘 엔지니어는 대체될 것이다. 결국 AI를 사용하는 건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이 좋은 엔지니어는 기회를 더 얻게 될 것이다.”
당신과 같은 세계적인 톱 엔지니어의 특징은 무엇인가.
“호기심이다. 코드가 작동하면 왜 작동하는지, 작동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지, 더 잘할 방법은 무엇이 있고, 그게 왜 더 좋은 방법인지 등 아주 디테일하고 깊은 수준까지 알고 싶어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코딩이 쉬워질수록 역설적으로 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영역에 관심을 둬야 한다. 그래야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과 퀄리티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존은 1998년 당시 구글에 영입 제안을 받았을 정도로 내로라하는 천재다. 하지만 그는 ‘검색엔진으로 어떻게 돈을 버냐’며 구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기업용 PC 관리 툴 기업을 창업해서 10년을 헌신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정보 보안 분야 창업을 해서 엑시트했다. 어찌 보면 젊은 날의 재능에 비해 커리어는 순탄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경험이 본인을 알아가고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었다고 한다.
최근 한 강연장에서 기업 가치 약 20조원, 디자인 협업 툴을 만드는 피그마의 창업자 딜런 필드도 ‘AI로 디자이너가 사라질 거 같냐’는 질문에 “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자인은 더 쉬워졌지만, 디자이너는 더 많은 디자인을 해야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답했다. 존과 딜런 모두 어떠한 일이 AI에 의해 극단적으로 효율화한다고 해서 그 일의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탁월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인간이 필요하고 업(業)의 본질과 디테일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전 산업과 교육이 AI를 쫓아가느라 바쁘다. 대학에서는 AI 관련 학과가 우후죽순 생기고 ‘AI’ 키워드가 있어야만 벤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돌고 있다. 쫓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언가를 깊게 이해하고 멀리,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는 역량, 그럴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