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하 루브르)에 전시된 ‘모나리자’에 환경운동가 두 명이 수프를 뿌리는 일이 발생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지구 환경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환경운동가들이 미술관에 전시 중인 명화에 공격을 가하는 저항운동을 함에 따라 세계 각국의 미술관이 예방에 비상이 걸렸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모나리자에 대한 공격은 이전에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911년 모나리자는 박물관 직원들에 의해 도난당했고 1956년 한 남성이 던진 돌에 훼손된 이후에는 강화 유리판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런데 르네상스 당시 미술가들의 행적을 기록한 조르지오 바사리(G. Vasari)가 ‘미술가 열전’에서 모나리자에 대해 극찬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는 도난당한 1911년까지 지금처럼 루브르의 중요한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한다. 도난을 계기로 모나리자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되는 도난에 대한 후속 뉴스는 사람들에게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루브르는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공간을 시민에게 개방했다. 이런 관심은 뜻하지 않게 모나리자 열풍을 가져 왔다. 모나리자 엽서와 인형이 판매되고, 심지어 속옷 브랜드도 모나리자 이름을 따서 명명할 정도로 모나리자에 대한 사랑은 폭발적이었다. 1914년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다시 전시되었을 때 이틀 동안에만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려 들었다.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 도난 사건으로 인해 세계인이 사랑하는 모나리자로 재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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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가 재평가된 배경에는 도난에 따른 특별한 관심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회화로서 완벽한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르네상스 미술의 모든 특징이 들어간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초상화에 도입된 미소는 파격적이다. 르네상스 회화의 발전을 논할 때 처음으로 꼽는 것은 그리는 재료의 변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른 걸작 ‘최후의 만찬’은 템페라로 그린 그림이지만, 모나리자는 유화를 사용함으로써 풍부한 질감의 표현과 미묘한 스푸마토(sfumato) 같은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어로 스푸마토라는 말은 ‘연기와 같이(사라지다)’라는 뜻의 미술 용어인데, 다빈치는 처음으로 모나리자의 미소와 눈가에 이 기법을 사용하여, 색과 색 사이 경계선을모호하고 부드럽게 처리함으로써 모나리자의 미소를 완성했다.
세상엔 세 개의 모나리자가 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루브르에 있는 모나리자다. 그런데 다른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미술사학자 사이에서 제기되어 왔다. 전문가들이 역사적 문서를 연구한 결과, 우리가 아는 모나리자보다 몇 년 전에 첫 번째 버전이 그려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아일워스(Isleworth) 모나리자’의 발견이다.
1913년, 영국 미술상 휴 블레이커(Hugh Blaker)는 영국 한 가정에서 이 그림을 구입한 후 대중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한동안 진위 이슈에 놓였고, 검증을 거친 뒤 많은 전문가는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 작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라파엘로가 다빈치의 화실을 찾았을 때 묘사한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다음은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을 저술한 바사리의 표현이다.
“눈은 현실의 삶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그반짝임과 윤기를 지니고 있으며, 아름다운 코는 장밋빛으로 매력적이다. 입 주위는 위아래의 붉음으로 인해 얼굴에 녹아들고, 색으로 칠했다기보다 살아있는 육체 그 자체로 우리에게 느껴진다.”
이런 내용을 보면, 라파엘로가 보았다는 모나리자는 아마도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아닌 아일워스 모나리자일 가능성이 커진다.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는 훨씬 젊어 보이고, 활기찬 모습이다. 그녀의 미소는 붉은 입술로 젊어 보이되 신비로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젊은 여성의 당돌함이 보일 뿐이다.
또 다른 모나리자 버전은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이하 프라도)의 모나리자다.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상당히 유사하다. 처음에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배경이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2012년 미술관이 복원 작업을 한 후에 놀라운 반전이 펼쳐졌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유사한 배경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이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동시대에 다빈치의 제자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일워스 모나리자, 캔버스에 유채, 84.5×64.5㎝. 사진 개인 소장품·스위스
3 프라도 모나리자, 패널에 유채, 76.3×57㎝, 1503~16년. 사진 프라도미술관·스페인
누굴 위한 미소일까
다빈치가 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미소를 띤 초상화 그림을 보는 건 흔하지 않다. 초상화가 으레 교황이나 왕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기에 일반인 초상화가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빈치는 왜 세속 초상화에 파격적인 미소를 그렸을까.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다빈치의 독수리 꿈’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다빈치가 직접 쓴 기록 노트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요람에 있을 때 독수리가 옆으로 내려와 꼬리로 자신의 입을 열고 입술을 두드렸다”라고 적었다.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꿈에서 독수리 꼬리가 입술을 두드리는 장면에 주목하면서, 다빈치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입술 주변의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미소를 혼외자로 태어나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헤어진 다빈치의 모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했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연상시키는 다빈치의 또 다른 그림은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작품이다.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너무나 흡사하다. 이 그림을 보는 독자들도 그림의 배경, 제일 뒤쪽에 있는 성 안나의 모습 등이 놀랍도록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의 방향은 물론 그림 배경도 모나리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림을 그린 시기도 거의 동일하다.
리자 부인’이라는 뜻인 모나리자의 모델로 알려진 상인 조콘다 부인 리자 게라르디의 얼굴을 다빈치는 왜 미소를 머금은 성모의 어머니인 성 안나로 표현한 것일까.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첫 번째 버전인 아일워스 모나리자의 모델이었던 조콘다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기억에서 한동안 잊혔던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이다.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그의 다른 그림에 비해 크기가 작아 휴대가 용이했고, 그는 죽을 때까지 모나리자를 소장했다. 세상을 떠날 때는 자기 자식같이 사랑하던 애제자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처음부터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주문자가 없는 다빈치 자신을 위한 그림으로 생각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어머니의 미소가 되어 다빈치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