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3월 19일 17년 만에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일본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3월 18~19일 이틀간 회의를 열고 단기 정책 금리를 -0.1%에서 0~0.1%로 인상했다.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경기 침체에 빠진 일본은 2016년 2월부터 일본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단기 정책 금리를 -0.1%로 확정해 8년 넘게 유지해 왔다.

일본은행은 금리 인상과 함께 2016년 2월 시작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도 해제했다.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를 끝내는 것은 8년 만이고, 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17년 만이다.

일본은행은 “최근 데이터(경제지표)나 공청회 정보를 통해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 강도가 강화하고 있음이 확인됐다”며 “2%의 ‘물가 안정 목표’가 지속·안정적으로 실현될 것으로 볼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마이너스 금리 종료 배경을 설명했다.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해제 등 금융정책 전환에 나선 것은 일본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금 인상→물가 상승’의 선순환 구축에도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이다.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 도쿄 시내  중심가 풍경. 사진 블룸버그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 도쿄 시내 중심가 풍경. 사진 블룸버그

주요 기업 임금 인상률, 33년 만의 5%대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지난해 3.1% 오르며 198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1월 소비자물가도 2% 상승했다. 일본은행은 금융정책 전환의 조건으로 2%가 넘는 안정적인 물가 상승과 임금 인상의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일본 최대 노동조합 조직인 ‘렌고(連合·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최근 집계한 주요 기업의 평균 임금 인상률은 5.28%에 달했다. 5%대 임금 인상률은 1991년(5.66%) 이후 33년 만이다.

일본 경제가 지난해 비교적 순항한 것도 ‘금리 있는 나라’로 전환에 자신감을 더했다. 일본은 지난해 실질 경제성장률(GDP) 1.9%를 기록해 한국(1.4%)을 앞질렀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한국을 추월한 것은 외환 위기 때였던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은행은 장기 금리를 조절하기 위해 도입한 수익률 곡선 관리(YCC) 정책과 ETF(상장지수펀드) 매입 역시 종료했다. 수익률 곡선 관리와 ETF 매입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본은행의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일본은행은 2016년 9월 장기물 국채 금리를 ‘0% 정도’로 조정하는 수익률 곡선 관리 정책을 시작했다.

YCC는 장기물 국채 금리 상한선을 설정해 그 이상 금리가 움직일 경우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거나 파는 방법으로 장기 금리를 조정하는 정책이다. 지난해 10월 ‘1% 상한’을 목표로 정했지만 시장 상황에 따라서 초과하더라도 용인하는 수준으로 완화했는데, 이번에 아예 폐지한 것이다. 일본은행이 작년 9월 집계한 보유 ETF의 시가는 60조6955억엔(약 54조원)으로, 장부가(37조1160억엔) 대비 평가이익이 23조5794억엔(약 209조8567억원)에 달했다. 일본은행은 REIT(부동산 투자 신탁) 매입을 2022년 6월 이후 중단한 상태라고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전했다.

도쿄에 있는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본부. 사진 블룸버그
도쿄에 있는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본부. 사진 블룸버그

韓 수출 기업들, 반사이익 얻을 수도

일본은행의 정책 전환은 주가, 환율 등 금융시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간 대규모 완화 정책에 힘입었던 엔저 기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영국 자산운용사 애버딘은 “(일본은행의) 금융 긴축이 엔화 강세를 불러와 한 해 동안 엔화가 (파운드화나 유로화 등) 다른 주요 통화 대비 8~10%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엔화 강세는 일본의 수출 기업 실적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 수출 기업들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국내 조선·자동차·반도체 기업들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 엔저를 기반으로 일본 주식 비중을 늘렸던 투자자들도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블랙록과 맨그룹 등 거물급 자산운용사들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오른 일본 증시의 추가 상승 압력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블랙록은 건설주와 대출 관련주, 맨그룹은 은행주와 함께 부동산, 철도 관련주가 비교적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은행주의 경우 수십 년간 초저금리로 이자 수익이 급감한 만큼 대출 수익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미치코 사카이 도쿄 JP모건 자산운용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위험 대비 보상이 높고 최근 지배구조 개혁을 선호하기 때문에 은행보다 보험사에 더 많이 투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책 수정 이후 민간은행이 단기간에 금리를 인상할 경우 이미 변동 금리로 주택 담보대출을 받은 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부동산 시장이 출렁일 수도 있다. 시중 금리가 오르면 일본은행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일본은행의 당좌예금 잔고는 518조엔(약 4610조원)에 이른다. 금리가 뛰면 이자 지급액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추가 인상 속도 관심… 내년 0.5%로 인상 전망도

게다가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잔액은 발행 잔액의 54%에 달한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국채 매입 중단 등으로 국채 금리가 오르면(국채 가격 하락) 막대한 평가 손실을 입게 된다. 일본경제연구센터는 단기 금리가 2%, 장기 금리가 3%까지 오르면 일본은행은 12조엔(약 107조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자본 잠식 상태에 빠질 것으로 지난해 4월 예상한 바 있다.

일본의 통화정책 변화는 국제 금융시장에도 미칠 전망이다. 일본의 시장 금리가 상승하면 일본 국채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 해외로 나갔던 자금이 돌아오면서 엔화 가치는 뛰고, 미국 국채 수요는 줄어들 수 있다.

엔화 강세가 한국 증시 상승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엔화에 비해 원화가 약할 때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매수 우위를 보이고 주가도 일본 대비 강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엔화 강세로 일본 여행자 수가 줄어들면 대일 여행 수지 적자는 개선될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지난 1월 여행 수지 적자는 14억7000만달러(약 1조9600만원)로 지난해보다 적자 폭이 커졌다. 일본과 동남아 등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은 크게 늘어난 반면 방한 외국인 수는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 금리 인상 속도 또한 큰 관심사다. 일본은행은 후쿠이 도시히코 총재 시절인 2006년 3월 양적 완화를 해제하면서 같은 해 7월에 단기 금리를 0.25%로, 2007년 2월에 0.5%로 인상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은행이 연내 단기 금리를 0.25%까지 올리고 내년에 0.5%로 인상을 목표로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은행 내부에서는 추가 금리 인상은 상징적 의미가 강한 마이너스 금리 해제보다 훨씬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