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차별의 문제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용광로 그 자체다.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문제가 된다. 그 출발은 흑백 인종차별이다. 인종차별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명시적인 차별(explicit discrimination)에서부터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암묵적인 편견(implicit bias)에서 나오는 각종 사고와 행동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어도어 멜피감독의 영화 ‘히든 피겨스(2016)’에서는 명시적 차별을 다룬다. 영화에서 주인공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분)는 천재적인 흑인 여성 수학자다. 그녀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1960년대 우주개발 경쟁 시기에 미 항공우주국(NASA)의 직원이 된다. 하지만 능력과 무관하게 그녀는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노골적인 차별을 받는다. 백인 직원들과 함께하는 회의에 참가할 수도 없고, 공용 화장실과 직원 식당 이용도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방의 공용 커피포트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된 상황이다.
나는 이렇게 명시적인 차별이 횡행했던 시기의 미국 대통령이 혁신과 이상적인 리더십의 아이콘으로 존경받는 제35대 존 F. 케네디라는 것에 놀란다. 물론 인종 문제로 내전(남북전쟁)까지 치른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 한 사람의 대통령이 시대 조류까지 한순간에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케네디는 취임 첫해인 1961년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행정명령을 발표하고, 암살당한 1963년에도 ‘일자리와 자유’라는 연설을 통해 시민권법 제정을 촉구한 바 있다.
어쨌거나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캐서린 존슨은 NASA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정식 직원이 되고 차별에서 해방된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 우주선 아폴로 발사 계획에도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에서처럼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온전히 해소됐을까.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63년 케네디 사후 반세기가 넘게 흘렀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백 인종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더구나 요즘에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편견에 의한 각종 차별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얼마 전에 있었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일이다. 이날 각각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에마 스톤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행동이 인종차별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두 배우가 수상자인 자신들의 이름을 부른 뒤에 트로피를 건넨 전년도 수상 배우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문제는 두 배우가 지나쳐 버린 배우가 공교롭게도 모두 아시아계 배우였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중국계 말레이시아 배우인 양자경이고, 다른 한 사람은 베트남계 미국 배우인 키 호이 콴이었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거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오래 살아 본 사람들은 저런 행동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을 걷다가, 혹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만난 낯선 사람에게도 ‘하이!’ 하면서 상냥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맞추며(eye contact) 간단한 인사말과 농담(small talk)을 하는 것이 미국의 일상적인 에티켓이다.
더구나 양자경을 대충 무시하고 지나간 에마 스톤은 옆에 서 있던 다른 미국 여배우들과는 반갑게 포옹하는 등 인사를 나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행동은 에마 스톤과 대동소이했다. 두 사람의 행동은 본인들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임 수상자라 할지라도 유색인종에게 호명당하고 트로피를 받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보여준 것으로 읽혔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명시적인 차별 행위와는 달리, 뭔가 딱 꼬집어 얘기하자니 그렇고, 가만있자니 찜찜한 이러한 암묵적인 차별 행동을 ‘미세 공격(microaggression)’이라고 한다.
미세 공격은 무의식중에, 자주,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가해자는 자기 행동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무심코 던진 농담일 뿐이야!’ 단순 실수라고 치부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오히려 예민하고 까탈스럽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암묵적인 차별 행동 ‘미세 공격’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어보자. 평신도 조직체에서 중간관리를 맡은 남성 A 집사가 있었다. 금융권에 몸담고 있는 A는 실적을 중시하는 기업체 업무 처리 방식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려 들었다. A는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매번 실적표를 그렸다. 미달자에게는 교묘하게 암묵적인 차별이 가해졌다.
그는 여건이 되지 않아서 해외 전도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B에게는 대신 고액의 헌금을 요구했다. 물론 이것은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맞춰 자발적으로 해야 하며, 절대로 부담을 주지 말라는 교회 당국의 방침과도 명백하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A는 이를 거절한 B를 볼 때마다 투명인간 취급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전체 모임에서 차례로 악수하거나 인사를 나눌 때도 B만 모르는 체하거나, 형식적으로 손만 ‘탁’ 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눈여겨보지 않은 제삼자는 여간해서는 눈치채기 힘든 이러한 미세 공격은 해를 거듭하며 도를 더했다. 세상의 번뇌와 고민을 잠시 멀리하고 교회에서 평강과 안식을 찾아서 너무 좋았던 B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자존감도 떨어지고 업무 처리능력도 떨어지는 등 일상이 많이 헝클어졌다. 그는 오랜 시간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야 했다. 결국 더 이상 이를 견디지 못한 B는 교회를 옮겼다. 교회가 싫어서가 아니라 오직 A 한 사람 때문이었다.
통상 미세 공격은 가해자가 고의성이 없거나 무의식적인 편견의 결과라고 본다. 따라서 명백한 고의성을 가진 A의 행동을 전형적인 미세 공격의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은따’ 즉 ‘은근한 왕따’가 미세 공격의 개념에 더 맞을 것이다. 이런 미세 공격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의도치 않게 타인이나 불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미세 공격을 가한 적이 몇 건이나 있을지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이 자리를 빌려 혹여 나의 무의식적인 언동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분이 있었다면, 피해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사과드린다.
나는 오래전에 예술의전당에서 행한 인문학 강좌 시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에게 이런말을 했다. ‘네가 혹시 외국인이 좋아서 그들과 결혼하겠다면 나는 인정한다. 다만 내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아직 흑인은 수용하지 못하겠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불특정 다수의 수강생들을 향해 한 말이었지만 나는 나중에 낯이 화끈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수강생 중의 한 분이 흑인 사위를 얻었는데, 그 가정이 무척이나 화목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의 편견을 대중 앞에 생각 없이 뇌까린 교양 속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 없는 미세 공격의 가해자가 A나 필자뿐일까? 아니다. 카톡방에서 특정 멤버의 질문에만 댓글을 지속적으로 달지 않거나 성의 없이 대답하는 일도 미세 공격이다. 개인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가 원장인 여의사에게 ‘원장님은 어디 갔어요?’라고 묻는 일, 남자 간호사에게 ‘참 드문 케이스인데 할 만해요?’라고 묻는 일 등이 모두 미세 공격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미 교포 3세에게 백인 교수가 ‘야! 너는 동양인인데 영어를 참 잘하는구나!’라고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이 백인 교수는 이 재미 교포 3세뿐만 아니라 그와 비교되어 의문의 1패(?)를 당하는 흑인 혹은 라틴계 학생들에게도 미세 공격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세 공격이란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1970년대 하버드대의 정신과 의사인 체스터 피어스 교수였다. 아직 심리학계 주류에 받아들여진 개념도 아니다. 충분한 객관적 데이터가 축적되지 않았고, 미세 공격과 정신건강 사이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연구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한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배려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