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한다. 애플은 중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계속할 것이다.”
3월 20~25일(이하 현지시각) 중국을 방문한 팀 쿡(Tim Cook)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현지 매체 인터뷰와 당국자 면담 등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했다. 팀 쿡 CEO는 3월 21일 상하이의 아시아 최대 신규 애플스토어 개장식에 참석한 데 이어, 22일 베이징에서 왕원타오(王文濤) 중국 상무부장(장관)을 면담했고, 24일에는 리창(李强) 총리가 기조연설을 한 중국발전고위급포럼에 참석했다.
왕 부장 접견 장면 영상을 공개한 중국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에 따르면, 쿡 CEO는 상하이 연구개발(R&D)센터 확장 등을 거론하며 공급망, R&D, 판매 매장 관련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쿡 CEO는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지난 2월 출시한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 프로의 중국 판매를 올해 중 시작할 수 있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쿡 CEO는 지난 1년 사이 세 차례 방중(訪中)길에 오르며 중국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과 무역갈등 여파로 애플의 중국 매출이 내리막길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의 2023년 4분기 중국 내 매출(208억달러)은 전년 동기 대비 13% 감소, 시장 기대치(235억달러)를 크게 밑돌았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첫 6주 동안 중국 내 아이폰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4% 감소했다. 같은 기간 화웨이 판매량이 64% 급증한 데 비해 애플 판매 부진이 지속된 것은 중국 공무원에게 ‘아이폰 금지령’ 이 내려진 데 이어, 애국 소비 열풍이 상당히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매출 20%에 의존하며 미국 다음으로 큰 시장인 중국에서의 판매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플은 대중(對中) 관계 개선에 사활을 걸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애플은 중국에서 판매하는 아이폰 등에 중국 바이두의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바이두가 오픈AI의 챗GPT 대항마로 내놓은 AI 챗봇 ‘어니봇’을 활용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AI 모델 출시 전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중국 정부 방침을 의식한 조치지만, 아이폰에 타사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차별성 강조 애플 생태계, 반독점법 위반"
팀 쿡 CEO의 중국에 대한 구애는 애플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반독점 공세가 본격화한 이후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서방에서 거세진 빅테크 반독점 규제 칼날로 인한 충격을 완충하려는 시도라는 시각도 있다. 2011년 취임 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쿡 CEO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쿡 CEO의 방중 기간인 3월 21일 미국 법무부는 16개 주(州) 법무 장관과 공동으로 애플을 상대로 반독점법 위반 소송을 냈다. 5년간 조사 끝에 제기한 이번 소송은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맥, 애플워치 등으로 구축한 ‘애플 생태계’를 겨냥했다. 미 법무부는 88쪽에 달하는 소장에서 “애플이 제품과 서비스의 우수함 때문이 아니라 타사 제품을 차별해 독점적 지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메릭 갤런드 법무 장관은 “애플의 비싼 가격, 더 적은 선택권, 더 나쁜 사용자 경험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미 법무부의 소송이 iOS라는 독자 운영체제(OS)와 아이폰, 아이패드 등 자사 하드웨어를 결합해 타사 제품과 호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사용자를 애플 생태계에 가두는 모든 행위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규정한 것이다. 실제로 미 법무부는 아이폰의 기본 문자 앱 ‘아이 메시지’가 안드로이드폰 사용자의 메시지 전송, 동영상 다운로드 속도를 떨어뜨리고, 수신 문자의 색깔을 안드로이드 사용자는 초록색, 아이폰 사용자는 파란색으로 구별한 점을 법 위반 사례로 지목했다. WSJ에 따르면, 허브 호벤캠프 펜실베이니아대 로스쿨 교수는 “애플을 차별화하는 요소는 반독점법으로 규제해야 할 대상” 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법무부가 소송에서 이길 경우 애플이 일부 사업부를 분리, 해체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이하 집행위)도 3월 25일 새로운 디지털 시장법(DMA)에 따라 첫 번째로 애플, 알파벳, 메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EU 집행위가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애플 경우 앱스토어의 조정 및 사파리 선택 화면에 대한 규칙이 주요한 조사 대상으로 파악된다. 사용자에게 더 저렴한 옵션이나 스토어 외부의 구독에 대해 알리는 것을 차단할 수 없도록 한 EU의 ‘조정 방지 규칙’을 애플이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애플은 이미 iOS 사용자에게 애플 앱스토어 외에 사용 가능한 대체 음악 구독 서비스를 알리지 못하도록 앱 개발 시 적용한 사실에 대해 EU로부터 19억5000만달러(약 2조62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애플카 개발 포기 등 혁신성 상실이 본질적 위기
궁극적으로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부상한 혁신성이 퇴색하고 있는 것이 애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애플은 2014년부터 ‘프로젝트 타이탄’으로 이름 붙인 자율주행 전기차 애플카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최근 개발을 중단했다. 2017년부터 T159라는 코드명으로 착수했던 애플워치용 디스플레이 프로젝트도 중단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3월 22일 보도했다. 삼성전자가 실시간 통·번역 등 AI 기능을 내세운 갤럭시S24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애플은 AI 스마트폰 사업에서 허를 찔렸다. 지난 2월 북미 지역에서 출시한 비전프로는 256GB(기가바이트) 저장 용량 기준 3499달러(약 460만원)에 이르는 비싼 가격이 단점으로 지목된다. 경쟁 상품인 MR 헤드셋 ‘퀘스트3(499달러)’보다 7배 비싼 가격 때문에 판매량 증가에 한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애플이 AI 경쟁에서 밀려난 후위기를 맞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WSJ는 “기술 기업 중 애플만 AI에 침묵하고 있다” 고 혹평했다. 그 결과 2023년 세계 최초로 3조달러(약 3900조원)를 돌파한 애플의 시가총액은 2024년 들어 400조원 이상(미국 현지시각 3월 25일 기준) 증발했다.
올해 들어 애플의 주가가 12% 이상 하락한 탓이다. 애플이 AI라는 거대한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고, 주요국 정부의 빅테크 반독점 공세의 집중 타깃이 되면서, 미래 성장 동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 주가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온다.
애플·구글·메타 등 빅테크 플랫폼 겨낭한 글로벌 반독점 전쟁
애플, 구글(알파벳), 메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의 시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각국 정부의 공세가 본격화하고 있다.
유럽엽합(EU) 집행위는 3월 25일 구글, 메타, 애플 세 개 사의 디지털 시장법(DMA)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DMA법은 거대 플랫폼 기업의 독점과 지배력 남용을 제한하는 법으로, 구글과 아마존, 애플, 바이트댄스,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여섯 개 기업을 ‘게이트키퍼(시장 지배력 남용이 가능한 플랫폼 사업자)로 규정해 집중 규제하고 있다. EU 집행위는 구글, 애플이 운영하는 앱스토어가 제삼자의 서비스를 허용하도록 하는 DMA 규정을 위반했는지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법 위반이 확인될 경우 해당 기업의 전 세계 총매출액의 10%까지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2023년 구글에 반독점법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3월 21일 애플에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메릭 갈런드 미 법무 장관은 “반독점법을 위반해 스마트폰 시장 독점력을 유지한 애플을 이대로 놔두면 애플의 독점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또 다른 경쟁 당국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메타와 아마존을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방송통신위원회가 2023년 10월 앱마켓 사업자인 구글, 애플이 거래상의 지위를 남용해 특정한 결제 방식을 강제했다는 이유로 구글과 애플에 680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2021년 제정된 세계 최초의 빅테크 앱마켓 규제법인 ‘인앱 결제 강제 방지법‘을 적용한 첫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