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현 감독의 2024년 영화 ‘파묘’의 제목은 유해를 옮기거나 고쳐 묻기 위해 무덤을 파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땅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땅은 사람이 밟고 선 물리적 장소뿐만 아니라 그와 맥락적으로 연결된 기후, 풍토, 산세와 수세까지로 확장된다. 이처럼 땅의 기운을 중시하는 풍수 사상은 땅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여기는 전통적 자연관을 반영한다. 묘지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의 의례적인 행위는 단지 망자의 영혼뿐만 아니라, 땅에 대한 경외심에서도 비롯된다.
영화 속 파묘 의식은 묵묵한 땅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요란한 악기 소리가 그 침묵을 깨고, 매달린 돼지, 차가운 칼, 붉은 피, 뜨거운 숯불 이미지가 무당의 움직임을 따라 정신없이 뒤섞인다. 본격적인 파묘 작업은 망자가 놀라지 말라는 의미인 “파묘요”라는 외침으로 시작한다. 삽의 얇고 넓은 면이 흙과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낸 후, 자세를 바꿔 땅을 계속해서 파 내려간다. 여러 인부가 동시에 파고 들어가는 땅의 형태는 미묘하게 사각형을 닮아가면서 깊이가 더해질수록 인간의 흔적이 점점 더 선명하게 새겨진다.

비로소 망자의 관이 모습을 드러낼 때 파묘 현장은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깊게 파인 땅 아래에서 풍수사와 장의사가 목재 관을 응시하는 장면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공존하고 있는 몽환적인 공간을 상상케 한다. 이들을 에워싸며 음각의 공간을 정의하는 벽은 인공적인 콘크리트나 벽돌이 아닌 사람 손의 흔적이 투박하게 남은 땅의 절개 면이다. 따라서 이곳은 다른 그 어떤 매개적인 재료나 구조 없이 인간의 몸과 자연만이 순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땅속 공간의 거칠고 느슨한 경계가 중심에 놓인 정교한 목재 관을 품고 있는 풍경은 땅과 흙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순환시킨다는 영화 속 대사를 강조한다.
음의 공간
대지 속으로 파고 들어간 공간이 발산하는 신비로움은 현실 세계와 대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태양 빛을 반사하는 대지 한복판에서 음각 공간만이 무겁게 머금고 있는 검은 그림자와 바깥을 향한 시야가 차단되며 땅의 내부로 서서히 가라앉는 신체의 경험에서 나타난다. 통상적인 인간의 생산 활동은 세계 위에 무언가를 양적으로 더한다. 그러나 음각의 공간에서는 소거된 땅 자체가 생산물이며, 여기에서 양적인 평형은 유지된다.
1969년, 미국의 대지 미술가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는 네바다주의 사막에 깊이 15m, 폭 9m, 길이 457m인 두 개의 구덩이를 조각했다. ‘이중 부정(Double Negative)’ 으로 명명된 이 작업은 전통적으로 조각품을 정의하는 부피 개념을 텅 빈 ‘부재’의 부피로 치환하면서 조각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조각은 더 이상 미술관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점유 가능한 날것의 환경이 된다. 소실점을 향해 펼쳐지는 황량한 대지의 절개 면과 그 내부로의 배회는 땅과 작품, 감상하는 주체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현실을 초월한 종교적인 경험과 숭고함을 선사한다.

역으로 구축된 신성한 건축
땅을 음각한 공간이 갖는 종교적 성스러움은 에티오피아의 ‘성 조지 교회(Church of Saint George)’에서 건축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13세기, 해발 2800m 고원 지대인 랄리벨라에 완공된 11개의 암굴 교회 중 하나다. 당시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왕은 주변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여정이 어려워지면서 ‘새 예루살렘’ 으로 불리는 대안적인 성지를 건설했다.
성 조지 교회는 일반적인 구축 방식과는 반대로, 대지 위에서 아래를 향해 지어졌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 노트르담대성당 같은 고딕 성당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을 때, 랄리벨라의 작업자들은 끌과 도끼로 지반을 조각하며 수직으로 하강했다. 교회를 둘러싼 주변 영역을 파 내려가면서 점차 중심 구조물이 드러나며 분리됐다. 교회 덩어리의 외부 창과 문은 내부 공간을 파내기 위한 진입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땅으로 가라앉는 묵직한 건축
땅을 음각하는 행위는 현대의 건축 생산 과정에서도 응용된다. 건축가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원초적인 성격의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땅에 의존한다. 2022년, 일본 우베에 완공된 ‘집과 레스토랑(House&Restaurant)’ 프로젝트는 ‘성 조지 교회’의 구축 방식과 유사해 보이지만, 차이점을 가진다. 프로젝트는 대지 위에 삼차원 모델링으로 설계된 다양한 형태의 구덩이를 파내면서 시작됐다. 복잡한 곡선 형태를 구현하면서도 사람의 불완전한 감각을 더하기 위해 흙을 파고 들어가는 과정은 작업자들의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이어서 건축물의 경계를 따라 상부 지면 높이까지 콘크리트를 타설한 후, 지면 하부의 나머지 흙을 걷어냈다.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