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44년 7월 1일(이하 현지시각) 전후의 국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회의가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개최됐다. 스키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여름철인 데다 전쟁 중이어서 국제회의를 개최하기에는 인력이나 물자가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았다. 회의장인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 모인 참석자는 730명이나 됐고 미국 동맹국 44개국과 식민지들을 대표하는 학자, 경제계, 정치계 지도자들이었다. 회의는 3주간이나 지속됐지만 전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될 미국의 의중에만 관심을 쏟느라 불편한 회의장 상황에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국제연합 통화금융회의’로 불린 이 회의 어젠다를 준비한 핵심 인물은 당시 미국 재무 차관이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였다. 이들은 이미 3년 전부터 미국 주도하에 국제회의를 준비했고 주요 목표는 ‘국제무역과 자본 이동의 확대’ ‘경제성장과 안정의 증진’ ‘개발도상국의 경제 개발 지원’이었다. 미국이 제시한 전후 세계 질서의 목표는 참여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이 해군력을 동원해 세계 항로 안전을 보장하고 미국 시장을 개방할 뿐만 아니라 자금까지 지원하겠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회의에서는 다음 세 가지가 결정됐다. 첫째, 달러 기반 고정환율제 도입, 둘째, 국제통화기금(IMF) 설립, 셋째, 세계은행(WB)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의 각국 대표는 1944년 7월 22일 모두 기꺼이 협정서에 서명했다.
자유무역은 이렇게 세계경제 질서의 목표로 등장했다. 자유무역은 케인스의 견해가 반영됐지만, 미국보다 경쟁력이 큰 국가가 없었기에 미국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합의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세계를 자유무역으로 이끄는 기반이 됐다. GATT는 1995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 설립에 자유무역 추진 소임을 넘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유무역협정(FTA)’ 바람이 일며 더 급속히 국가 간 문턱을 낮추고 세계화를 향해 나아갔다. 2001년 12월 11일 중국의 WTO 가입은 이런 경향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다.
자유무역 확대는 세계경제 성장을 추동하고 소비자 이익을 신장했지만 국제 및 국내 불평등 심화, 환경 악화, 노동자 권익 침해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은 세계화로 만들어진 글로벌 공급망(GVC) 리스크를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일부 국가가 자국 의존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효율성과 경제성을 극대화하려는 정책 목표가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 우선 정책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최근 무역 시장은 탈세계화로 반전되고 있다. 그렇다고 국제 교역을 중단하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국가 간 공급망으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 적극적으로는 국내 생산망을 구축하기 위해 보조금과 산업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그동안 적대국과도 서로 ‘손을 묶는 정책’으로 평화와 번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국가들이 묶었던 손을 풀고 있다. 상호 의존의 무기화를 막기 위해서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입 의존도는 2018년 30.4%에서 2022년 13.3%로 급락했다.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을 이유로 기존 GVC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GVC 연계 비중은 올해 1분기 기준 72.5%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54.1%다. 특히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인 전자(85.3%), 자동차(80.2%), 조선(78.9%) 분야는 연계 비중이 80% 정다. 공급망에 변동이 생기면 수출경쟁력이 크게 변동할 수 있다. 농산물 대외 의존도는 2023년 기준 70.9%다. 곡물은 78.1%로 가장 높고 육류 64.6%, 수산물 63.5%다. 자급률은 29.1%에 불과하다. 식량 안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더 심각한 건 94.2%에 달하는 에너지 대외 의존도다. 석유 대외 의존도는 97.4%, 석탄 87.5%, LNG 84.9%로 에너지 자급률은 5.8%에 불과하다. 국제 정세가 불안해지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경제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는 구조다. 자유무역 시대가 저물고 경제 안보가 강조되는 시대에 우리나라는 기존 GVC와 헤어질 결심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책이 필요하다. 너무 늦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