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증시가 34년 만에 사상 최고치(3만8915) 경신에 이어 4만1000선을 돌파한 뒤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연내 5만대에 올라설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되는 추세여서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 회복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도 나온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경제·경영 학자와 일본인 금융 전문가에게 주가 및 경제 전망을 들어봤다. 이들은 지금부터 주가가 본격적으로 오르겠지만, 경제는 예전 같은 성장세를 기대하긴 어렵고, 안정적 유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국제 상학부 교수, 류재광 간다외국어대 외국어학부 교수, 최상철 간사이대 상학부 교수와 노무라증권에셋매니지먼트의 주식운용본부장을 지낸 다부치 에이이치로(田淵英一郞) 굿뱅커스 집행임원과 인터뷰한 내용을 지상 좌담회 형식으로 소개한다.
일본 증시 상승 이제 시작 “연내 4만5000 돌파 가능”
일본 주가가 앞으로 더 오를까.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국제 상학부 교수(이하 국중호) “미·중 갈등 등 외부 환경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추세적으론 더 상승할 걸로 예상한다. 아날로그 성향이 강한 일본인 특성으로 볼 때 정보통신기술(ICT)이나 인공지능(AI) 분야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소재·부품·장비 산업에서 강점을 보일 것이다.”
최상철 간사이대 상학부 교수(이하 최상철) “주식 투자에 소극적이던 개인 투자가들의 기여도가 확대돼 증시에 호재로 작용할 듯하다. 올해 도입된 신NISA(소액투자비과세제도)를 통한 주식 투자액이 급증하고,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 잔액은 2121조엔(약 1경9089조원)을 기록, 사상 최고다. 이 자금이 증시로 유입될 가능성이 커 추가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
다부치 에이이치로 굿뱅커스 집행임원(이하 다부치 에이이치로) “예상보다 빠른 주가 상승 속도에 놀랐지만, 오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최근 증시 흐름은 이례적인 상승이나 버블(거품)이 아니다. 일본 기업들이 자본정책, 수익성 향상, 기업 지배구조 등 개혁에 나선 덕분이다. 일본 주식이 아직 비싸지 않다는 것도 배경이다. 일본 주식의 저PBR(주가순자산비율) 상황이 시정되어 가는 과정이다. 2024 회계연도에 일본 기업의 실적이 당초보다 5~10% 상향될 걸로 예상한다. 일본 주가 상승이 이제 막 시작됐다. 닛케이가 연내 4만5000선을 뚫을 가능성 크다.”
일본, 뚜렷한 성장 없이 안정과 개인 행복 추구
일본 경제가 다시 성장할까.
류재광 간다외국어대 외국어학부 교수(이하 류재광) “수십 년 만에 물가가 오르고 근로자 임금도 증가하는 추세다. 기업들은 오랜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했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디지털화는 경쟁국에 비해 늦고, 세계 최고 고령화사회에다 저출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인구 감소’에 어떻게 대응하고 성장 패러다임을 가져갈지 방향성을 찾지 못했다.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뚜렷한 성장세로 가기가 쉽지 않다.”
국중호 “저출산 고령화 영향으로 국내총생산(GDP) 총액이 커지는 것은 어렵지만, 1인당 GDP는 완만한 속도로 올라갈 것이다. 정치, 안보 면에서 미·일 동맹과 쿼드(QUAD· 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 협의체) 중시, 디지털 부문의 약점을 보완하는 공급망을 강화하고, 사회 면에선 지역 전통을 살린 관광 입국을 추진할 걸로 예상한다.”
최상철 “물가 상승률이 임금 상승률을 웃도는 등 실질 경제성장이 쉽지 않다. 잠재성장률이 1% 이하로 떨어져 ‘제로 성장’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관리형 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것 같다. 슬로 라이프와 행복을 추구하는 북유럽형 저성장, 복지 중심 경제 시스템을 목표로 하는 듯하다.”
다부치 에이이치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물가가 정상화됐다. 일본 경제가 성장 타이밍으로 변화했다는 뜻이다. 제로 금리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더 올릴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플러스 금리로 돌아온 것은 증시 강세와 경제 정상화를 예상할 수 있는 데이터다.”
일본 경제가 다시 성장할까.
최상철 “강점은 커뮤니티(지역)를 중시하는 것이다. 각 지역의 자산(음식 문화, 관광 자원 등)이 일본의 새로운 소프트파워가 될 걸로 본다. 과거 전성기의 경제적 성공을 뒷받침한 세계화 의욕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자신만의 성(城)을 만들고, 그 안에 스스로 갇혀 버린 것은 단점이다.”
국중호 “전체 판을 깨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매뉴얼에 따라 수행해 가는 안정성이 강점이다. 이는 상대방에게 신뢰성을 주어 장기간 거래가 이뤄지는 쪽으로 작용한다. 개개인의 주체적 판단 능력이 약한 것은 단점이다. 그러다 보니 순발력을 발휘해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융통성이 떨어지고, 비판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디지털 분야에서 뒤처지고, 정치의식이 낮은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다.”
류재광 “최대 강점은 부품과 소재 중심의 안정된 기술력이다. 반도체, 산업용 로봇, 전자 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품과 소재의 국제 경쟁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매뉴얼 사회에 익숙해져 정해진 일은 탁월하게 처리하지만 돌발 상황이나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단점으로 꼽을 수 있다.”
저성장, 고령화, 인구 감소 전제로 새 패러다임 짜야
한국도 저성장기에 들어선 것 같은데, 일본에서 얻을 교훈은.
류재광 “일본은 예측 가능했던 인구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사회보장비 급증으로 막대한 재정 적자를 초래했고, 그 결과로 유연한 경제정책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서고, 한류(韓流)가 전 세계에 유행하면서 ‘성공’ 자만심에 빠진 측면이 있다. 기존의 고성장, 고금리, 인구 증가를 전제로 한 사회구조를 저성장, 저금리, 고령화, 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새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 경제·사회 시스템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대전환해야 일본 같은 장기 침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국중호 “일본은 축적(stock) 속성이 강한데, 이는 강점으로도 단점으로도 나타난다. ‘기술·지식·자본’ 등 좋은 것이 쌓이는 반면, 번잡한 관습이나 국가 채무 같은 나쁜 것도 늘어난다. 국가 채무를 쌓이게 한 요인은 고령 세대에게 편익이 많이 돌아가는 사회보장 및 선심성 공공 지출이나 생산성 낮은 좀비 기업을 연명하게 하는 낭비적 지출이다.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며 정책 추진의 발목을 잡는 ‘국가 채무 증가’라는 부(負)의 유산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최상철 “과거 미국 경제를 따라잡을 당시 프런티어(개척자) 정신을 가진 경영자들이 등장해 파괴적 이노베이션으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잃어버린 30년을 거치며 일본 경영자들은 축소 지향적 경영에 익숙해져 소극적(점진적·계속적) 혁신에 안주했다. 2000년대 들어 이커머스 혁명이 진행된 지금까지 일본의 소비·유통시장에서 혁신적인 업태나 비즈니스 모델이 전무한 실정이다. 한국도 저성장기에 접어들어 경제 난국을 타개할 경영 이노베이터들의 ‘의욕’이 꺾이지 않을지 걱정이다.”
일본의 기술·지식·자본 활용하고 지역 간 협력 확대해야
한국의 미래를 위해 조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국중호 “한국인의 동적(動的) 특성을 살려 일본이 축적한 방대한 기술, 지식, 자본을 활용하는 전략이 윤택한 삶을 가져오고,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줄 것이다.”
류재광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 저성장 문제는 단기적인 시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 기업, 정부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의사 결정을 하고, 끈기 있게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상철 “정치적 이슈에 매몰된 일본 중앙 정부와 달리 각 지역 경제권 리더들은 전향적인 자세와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한국과 경제협력을 원한다. 한국은 도쿄 중심에서 벗어나 주요 지역 중심으로 일본 접근 전략을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