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버드대 의학·인류학 박사, 전 세계보건기구(WHO) 에이즈국 국장, 전 하버드대 의대 교수, 전 다트머스대 총장, 전 세계은행 총재 사진채승우 객원기자
“미국 LA카운티에서 일하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사람에게 중요한 세 가지 P가 있다고 했다. Place, Person, Purpose. 장소, 사람, 삶에 대한 목적. 3P 중 정신 자원에 가장 중요한 건 삶에 대한 목적이 아닌가 싶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우울할 것이다.”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가 따스한 눈빛과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2019년 세계은행 총재직을 사임한 뒤 저소득 국가를 위한 인프라 투자와 정신 건강 개선에 전념하고 있는 김용 전 총재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인구 붕괴를 염려할 만큼 한국인의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 속출해서다.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한국은 집단 자살로 향하는 나라 같다’고 놀라움을 전했다. 과거 필자의 인터뷰에 등장했던 미국 작가 마크 맨슨도 한국 방문 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동영상으로 경종을 울렸다.
우리가 K콘텐츠의 힘에 취하는 사이, 세계는 K멘털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출산율, 치솟는 20대 자살률, 10대 우울증의 가파른 증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김용 전 총재는 현재를 ‘역사적으로 전 세계 유례가 없는 정신 재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전 국민 대상 심리적 응급 훈련을 권고했다. 방관하면 현대적 형태의 제노사이드와 다를 바 없다는 강도 높은 발언으로, 전방위적인 대응을 촉구하며.
빈곤국에서 에이즈와 결핵을 퇴치한 접근법으로 차근차근 급박한 생명 구조 작업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김용 전 총재를 만났다. 김용은 하버드대에서 의학과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 의대 국제 보건학과장을 역임했다. 다트머스대 총장, 세계보건기구(WHO) 에이즈 국장, 세계은행 총재로 일하며 최전선의 의료⋅금융 행정가로 헌신했다. 시야가 넓은 사람답게 인터뷰 내내 다양한 맥락을 하나로 꿰뚫어 읽는 비범함, 밀도 높은 대화 속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돋보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에 미국 작가 마크 맨슨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동영상을 올려서 이슈가 됐다. 세계인이 보는 한국의 정신건강, 그렇게 심각한다.
“(침착한 어조로) 너무 충격적이라 우려스럽다. 전 세계 그 어떤 국가, 어떤 도시도 이런 사례가 없었다. 한국의 자살률과 우울증 수치는 지난 2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지만, 치료 케이스는 최저 수준이다. 서울의 합계 출산율(가임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은 0.57명(2022년 기준)으로, 이는 유럽에 흑사병이 돌았을 때보다 낮은 수치다. 역사상 어떤 전쟁이나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이보다 낮은 적은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사도 문제다. 1970년대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은 0.7%였지만 지금은 40%에 육박한다.사회 변화가 이 정도로 익스트림(extreme)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사실 한국인은 너무 자주 그런 데이터를 접하다 보니 오히려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발 벗고 나서게 된 계기가 있나.
“내가 미국의 정신 건강 보건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하던 중 직접 VIP(윤석열 대통령)의 부탁을 받았다. 당장 팀을 꾸리고 함께할 파트너를 수소문했고, 예일대 나종호 교수에게 긴급 이메일을 보냈다. 그 즉시 한국 내 전문가들과 팀을 꾸려서 활동을 시작했다.”
김용과 함께 한국인의 정신 건강 긴급 구호자로 나선 나종호는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이라는 책을 낸 예일대 (의대) 정신과 교수다. 긍휼한 마음을 품은 최전선의 전문가 나종호와 김용의 협업은 한국의 치솟는 자살률과 곤두박질치는 출산율에 제동을 걸 수 있을까? 김용은 문제 해결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해결 가능한 문제로 보나.
“나는 2000년대 초까지 아프리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에이즈와 결핵 퇴치를 위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약 가격을 내리는 등 전 지구적인 정책이 나오도록 설득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멘털 케어도 유사하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전방위적으로 사회 리더들이 중지를 모으고 앞에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 건강 문제는 인구 붕괴라는 근본적인 위협이기 때문이다.”
정신 건강 문제가 곧바로 인구 붕괴로 이어진다고.
"그렇다. 나는 WHO와 세계은행에서 일했다. 금융으로만 접근해도 문제가 심각하다. 인구는 점점 늙어가는데 국민연금을 낼 젊은이들은 사라지고 있다. 출산율이 곤두박질치고 자살률이 치솟고 있다는 것에 무감해지면 안 된다. 붕괴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지금 신생아 수를 보라. 1990년대만 해도 한 해 70만 명이던 신생아 출산 수치가 지금은 20만 명으로 떨어졌다. 이런 식이면 미래 노동력이 다 사라진다. 출산율 추락은 현재 한국인이겪고 있는 외로움과 우울증에 깊은 뿌리가 닿아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전 세계인이 K멘털을 걱정하는데, 한국인만 모르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한숨을 쉬며)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내 개인사를 이야기하면, 나는 1959년생이다. 처음 내가 세계은행 총재로 임명됐을 때 직원들이 1959년부터 한국 관련 문서를 뽑아줬다. 1959년의 한국은 교육 정도가 매우 낮은 극빈국이었고, 세계은행에서대출받을 자격조차 안 되는 약소국이었다. 1차 대출이 나간 건 1963년, 2차 대출은 5년뒤인 1968년에야 가능했다. 그만큼 희망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나라가 어떤 성공 스토리를 썼는지 세계가 알고 있다. 내가 세계은행 총재로 제삼세계를 방문하면 아프리카 나라 대부분이 한국을 선망한다. 한국의 궤적을 따르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출산율 추락, 자살률 급증이라는 성장 청구서를 받고 말았다. 1959년을 기준으로 여성 1명당 출산율이 6명이었는데 지금은 0.6명에 불과하다. 이 변화가 내 생애 주기 안에서 다 일어났다. 극빈국에서 단숨에 높은 국내총생산(GDP)에 이르렀고, 이어서 인구 붕괴를 걱정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뿐 아니라 미국 한인 사회의 자살률도 타 인종 대비 네 배 수준이라고 들었다. 이민자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흔들림 없는 정신 기반을 갖게 된 비결이 있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다. 에이즈와는 달리 정신 건강은 삶과 밀착된 문제다. 살펴보면 우리 집안에 자살자나 뇌 질환을 앓았던 구성원은 없다. 더불어 하버드대 의대에서 좋은 스승들을 만난 것도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내 정신 건강의 근본적인 비결을 묻는다면, 그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 덕분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라고.
“어머니 말씀이, 내가 1968년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권 운동을 하는 장면을 보고 다른 형제자매보다 더 깊은 동요를 느꼈다고 했다. 잘은 모르지만, 내면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꿈틀거림이 있었다. 고작 아홉 살이었는데도 말이다.그때 이미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 원칙은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WHO에서 에이즈와 결핵을 치료하겠다고 했을 때 글로벌 보건 리더 99.9%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비용 효용이 안 맞는다고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자문한다. ‘예수님이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복잡해서 안 된다고 물러섰을까?’라고 말이다. 종교적인 언어를 쓰지 않아도 서양의 위대한 사상가, 인류학 문헌들은 증언하고 있다. ‘가장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 선택권을’이라고. 현장에서 구호를 시작해 보니, 아침과 저녁에 약을 한 번씩 먹는 것만으로도 에이즈는 드라마틱하게 개선됐다. 그런데 해보지도 않고 아프리카의 2500만 에이즈 환자를 비용 효율이 안 맞으니 죽게 내버려두자고? 당시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현대적 형태의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됐을 것이다.”
정신 질환, 자살 문제를 내버려두는 것도 현대적인 형태의 제노사이드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노사이드는 과거의 끔찍한 역사라고만 단정했다.
“한국의 극한 환경은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매일 15시간씩 공부하지 않으면 낙오되는 사회를, 한국 청소년들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IMF 전 총재였던 라가르드에게 한국 학생은 7시부터 11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했더니, 놀라워했다. ‘네 시간만 공부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시험을 잘 보느냐’고 말이다(웃음). 나중에 한국의 출산율, 자살률 데이터를 다 보고 나선 경악했다. ‘한국은 집단 자살로 향하는 나라 같다’는 거였다.”
당신은 다트머스대에서 총장으로 재임 시절 '세계의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수많은 글로벌 인재를 키워냈다. 치열한 경쟁으로 고통받는 '헬조선'의 청년에게 뭐라고 조언하겠나.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도 내 기본 메시지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라’였다. 이 메시지를 적용하기 힘든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그만큼 상황도 복잡하고 선택권도 제한적이다. 청년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낮은 자세로 살라’고 하면, 그건 덧없고 맥없는 소리가 될 것이다. 한국적 맥락이 그렇다. 주거가 불안해서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보세요’ ‘올바른 쪽에 서세요!’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나. 무엇을 하라는 이야기가 더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섣불리 조언하기가 어렵다.”
몇몇 언론이 제기했던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마찰은 그야말로 억측이라고 일축했다. 이어서 질문한 의대 증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환자의 안위가 걱정된다’며 말을 아꼈다. 부디 ‘환자를 중심에 두고 관계자들이 다시 대화를 시작할 것’을 권고하며.
뼈아프지만 '한국은 집단 자살로 향하는 나라 같다'는 서구의 지적에, 정신적 재난 상황임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쳐가야 할까. 희망이 있나.
“굉장히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해결할 수 있다. 단 사회 전체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일단 현시점을 정신적 응급 상황이라고 선포하고 심폐소생술(CPR) 교육을 해야 한다.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지표와 주변인의 위기를 알아채고 살릴 수 있는 응급 교육이 시급하다. 하버드대 의대 사회의학 담당 교수에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인디언 여성에게 인지 행동 치료의 기본을 가르쳤더니 불안 장애가 현저하게 낮아졌다는 보고를 들었다.
다른 국가의 성공 사례도 적극 참고해야 한다. 이탈리아, 핀란드가 정신 건강 문제를 개선하면서 출산율이 급등했고, 일본도 자살 방지에 매진하면서 출산율이 올라갔다. 정신 건강은 복잡성 높은 이슈지만, 무엇보다 교육과 주거 등 청년 세대의 기본 문제를 직시해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부탁한다.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꼭 도움을 요청하라. 부디 도움받을 용기를 내라.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의미 있는 일을 하라’는 선구자적 인도보다 ‘도움받을 용기를 내라’는 어른 김용의 호소가 더 울림이 크고 짙었다. 그의 바람대로 ‘능력 있음’ 이전에 ‘살아 있음’이, 존재만으로 가족과 이웃에게 공헌하고 있다는 각성이, K멘털의 코어에 단단히 자리 잡기를.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