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크론이 2월 27일 “5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HBM3E) 대량생산을 시작했다”고 밝혀 업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최대 화두인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고성능 D램이다. 챗GPT 같은 생성 AI(Generative AI)는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시켜 질문에 대한 답의 정확도를 높이는 게 핵심이다. 이때 일반 D램 대비 데이터 용량·속도를 10배 이상 높인 HBM이 사용된다.
2022년 말부터 전 세계적인 생성 AI 열풍에 힘입어 HBM 수요가 급증했다. SK하이닉스가 AI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엔비디아를 고객사로 확보하며 앞서가는 사이, 마이크론은 한 자릿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시장에서 가장 앞선 제품인 4세대 HBM을 건너뛰고 5세대 양산에 나선다고 한 것이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2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7월 26일까지 마이크론에 자문, 노무 용역을 제공해선 안 된다”라며 “이를 위반하면 1일당 1000만원을 SK하이닉스에 지급하라”고 했다. 하루 1000만원의 이행강제금은 SK하이닉스 측이 요구한 액수 전액이다. 법원이 전직 금지 가처분 사건에서 신청인의 요청을 100% 받아들여 이 정도 액수의 이행강제금을 선고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100만~500만원 선에서 결정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법조계에선 가처분 결정이신청 7개월 만에 이뤄진 것도 빠르다는 반응이 나왔다. 가처분 신청 대상자가 해외에 있으면 소송 관계 서류 내용을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송달에만 6개월이 걸린다. 국외 송달은 통지서를 번역하고 외교부와 현지 영사를 거쳐야 해 국내 송달보다 시일이 걸린다.
이 사건에서 SK하이닉스를 대리한 법무법인 화우는 가처분 인용을 얼마나 빨리 받아내느냐가 관건이었다고 말했다. A씨가 SK하이닉스와 맺은 전직 금지 약정은 7월 26일 끝난다. 법원의 이행강제금은 선고가 난 시점부터 전직 금지 약정 기한까지 적용된다. 선고가 빨리 날수록 A씨가 마이크론을 계속 다니기 위해 법원에 내야 하는 이행강제금이 불어난다.
가처분 인용 결정을 받아낸 화우 신사업그룹의 이광욱(사법연수원 28기) 그룹장(변호사)은 “HBM 시장에선 SK하이닉스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시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HBM 설계에 참여한 직원의 해외 경쟁사 이직을 막아 기술 유출을 저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기술 유출 관련 정부의 정책 자문에 참여해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장관상을 받은 이근우(35기) 변호사는 “최근 우리가 전통적 우방이라고 생각했던 국가에 우리 기술이 넘어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 국가 핵심 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HBM 설계하다 퇴사한 직원…챗GPT 광풍 무렵 마이크론 이직
A씨는 2001년 SK하이닉스에 입사해 20여년간 D램과 HBM 설계 관련 업무를 담당하다 2022년 퇴사했다. 그는 “퇴직 후 2년간 마이크론 등 경쟁 업체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직 금지 약정, 국가 핵심 기술 등의 비밀 유지, 경업금지 서약서를 작성하고 회사를 떠났다. 국가 핵심 기술은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 안전 보장, 국민 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산업 기술로 산업부가 지정한다. HBM을 포함한 D램 설계 관련 기술은 국가 핵심 기술에 포함된다.
그런데 A씨가 퇴직한 지 약 1년쯤 지났을 무렵 SK하이닉스는 그가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사실을 파악했다. 정확한 입사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직 금지 약정 기간 내에 이직한 것만은 확실했다. 문제는 A씨가 퇴직한 시점이다. 2022년 7월 퇴직 당시 AI 반도체 대장주 엔비디아 주가는 140~150달러에 그쳤으나 챗GPT 돌풍 이후 2023년 상반기엔 400달러를 넘어섰다. SK하이닉스로 HBM 주문이 쏟아지는 사이 후발 주자인 마이크론은 기술 격차를 최대한 빨리 좁혀야 했다.
SK하이닉스는 최대한 빨리 전직 금지 가처분 인용을 받기 위해 그동안 기술 유출 관련 사건을 여러 차례 맡겼던 화우의 신사업그룹에 SOS를 쳤다. 신사업그룹은 화우 내 스타트업으로 불린다. 디지털, AI, 환경, 정보 보안 등 신사업 관련 법률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 카이스트 출신으로 보안 업체 근무 이력이 있는 변호사,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개발 이력이 있는 변호사 등 인력 구성도 다양하다. 이번 사건에 참여한 정호선(변호사시험 6회) 변호사는 2022년 화우 입사 이래 맡았던 전직 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모두 승소를 거둔 에이스다.
신사업그룹팀의 첫 미션은 ‘최대한 빨리 국외 송달을 하라’는 것이었다. 국외 송달은 소송 관련 서류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외교부, 미국 현지 영사를 거쳐 마이크론에 전달되는 과정을 거쳤다. 화우 변호사들은 가용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빨리 서류를 전달해달라고 재촉했다. 한 기업의 일반적인 기술이 아닌,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가 유출됐고, 지금도 빠져나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신속하게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SK하이닉스 기술 차별성 강조한 화우…“마이크론, 선도 업체 영입 절실”
법원은 근로자와 기업이 체결한 전직 금지 약정이 유효한지를 ‘사용자의 영업 비밀이나 노하우, 고객 관계 등 전직 금지에 의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용자 이익이 존재하는지’ 등을 고려해 판단한다. 헌법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와 근로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A씨가 퇴사 전 HBM 관련 업무를 했기 때문에 마이크론에서도 같은 업무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화우는 이에 더해 A씨가 해외 유학이나 근무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스카우트됐다는 점을 들어 HBM 관련 업무에 종사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마이크론이 1위 업체인 SK하이닉스의 기술 인력을 빼갈 유인이 충분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HBM 시장 현황과 두 회사 간 기술 격차를 재판부에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3세대 HBM(HBM2E)부터 기술 난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MR-MUF 공정을 도입해 경쟁사와 차별화했다. MR-MUF는 반도체 칩을 쌓아 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공간 사이에 주입하고, 굳히는 공정이다. 이 공정을 통해 칩 두께를 유지하고 용량을 높이면서, 쉽게 휘어지지 않는 견고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마이크론으로서는 이런 기술이 부재한 상황에서 한 자릿수에 불과한 시장점유율을 높여야만 했다. HBM 가격은 일반 D램보다 2~3배 정도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고부가가치 상품 수주를 받지 못하고 시장에서 뒤처지면 기업은 수익성을 확보할 기회를 잃는다. 화우는 “고부가가치 상품인 HBM 없이는 D램 시장에서도 도태될 것이 명확한 상황이 되자, 마이크론은 선도 업체인 SK하이닉스 인력을 영입해 기술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재판부에 주장했다. 재판부는 SK하이닉스의 손을 들어줬다.
이 변호사는 “이행강제금 액수는 법원이재량으로 정한다”라며 “1000만원이라는 금액이 전부 받아들여진 것은 우리나라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 기술 중에서도 최근 가장 중요한 HBM 기술이 외국 회사로 넘어갔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고려한 결과”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 전에 A씨가 해외에 있는데 이행강제금을 어떻게 집행할 것이냐는 질문도 했다고 한다. 가처분 결과가 기술 유출을 막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지를 고심했다는 의미다. 이 변호사는 “국내 재산을 압류하거나 가압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