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 1400원은 대한민국에서 ‘낯선 숫자’다. 현재의 자유변동환율제가 도입된 1998년 이후 25년 동안 달러 대비 원화 환율 1400원 이상이 지속한 기간은 약 140일이다. 시기별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직후 60여 일,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인 2009년 초 20여 일, 레고 사태가 일어난 2022년 9월 말 이후 30여 일 등 세 차례에 불과하다. 원·달러 환율 1400원 돌파는 외환 위기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심리적인 위험선에 진입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4월 16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장중 1400원을 돌파한 뒤, 1394.5원으로 거래를 마감했다. 원화 약세 쏠림을 막기 위해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하 한은)은 이날 1년 5개월 만에 외환시장 구두 개입에 나섰다. 4월 17일에는 주요 20개국(G20) 재무 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 중인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 장관과 만나 “급격한 외환시장 변동성에 대응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공동 입장을 발표했다. 한일 외환 당국의 공동 시장 개입은 처음이다. 이들은 이날 재닛 옐런 미국 재무 장관과 한·미·일 재무 장관 회의를 열고 “최근 엔화와 원화의 급격한 평가절하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심각한 우려를 인지했다”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외환 당국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으로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7.7원 하락한 1386.8원으로 마감해 8거래일 만에 상승세를 멈췄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월 1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기준금리 결정에 관한 기자간담회를 하던 중 생각에 잠겨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월 1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기준금리 결정에 관한 기자간담회를 하던 중 생각에 잠겨있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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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 아시아 통화 대비 원화 절하율 확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지연,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 등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 등으로 인한 글로벌 달러 강세 열풍 속에서도, 한국 원화의 약세는 도드라진다. 달러당 154엔까지 오르며 34년 만에 최대 엔저를 겪고 있는 일본 엔화가 3월 이후 4월 16일까지 2.70% 절하(달러 대비)된 동안 원화는 4.74% 절하됐다. 대만달러(-2.66%), 태국 밧(-2.52%), 싱가포르달러(-1.39%) 등 다른 아시아 통화보다 절하 폭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원화 약세가 4월 12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가팔라졌다는 점을 주목한다. 4월 11일까지 엔(-1.87%), 대만달러(-2.08%), 태국 밧(-2.37%) 등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원화의 절하율(-2.46%)이 확대됐다는 이유에서다.

원·달러 환율은 2023년 하반기부터 달러당 1300원 선 위로 올라왔지만, 1364.1원으로 마감한 4월 11일 이전까지는 1360원 위로 올라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외환시장에서는 4월 12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후 언론 브리핑에서 이창용 한은 총재의 발언이 원· 달러 환율의 상방 저지선이었던 1360원 선을 뚫리게 했다고 본다. 

최근 원·달러 환율 흐름에 대해 이창용 총재는 이같이 말했다. “최근 1360원 선까지 오른 것은 미국 피벗(pivot·통화정책 기조 전환) 기대가 뒤로 밀리면서 달러가 강세를 나타낸 가운데,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가 특히 더 절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변국 통화에 프락시(proxy·대용물) 되다 보니 펀더멘털보다 과도하게 절하된 면이 있지 않나 유심히 보고 있다.”

시중은행의 외환 딜러는 이에 대해 “달러당 1360원에서는 외환 당국 개입으로 원화 약세가 조정될 것으로 기대했던 다수 시장 참여자가 ‘환율 상승은 프락시 때문’이라는 이 총재 발언에 당황했다”면서 “이후 ‘원·달러 환율 1400원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분위기가 확산됐다”고 전했다.

"美보다 먼저 금리인하" 발언, 원화 약세 자극

인플레이션 재발 우려로 미 연준의 피벗 시기가 늦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총재가 “미국이 피벗 시그널을 준 상황에서는 국내 물가 상승률에 대한 고려가 더 크기 때문에, 미국보다 먼저 (금리를 인하)할 수도, 뒤에 할 수도 있다”고 밝힌 것은 한미 금리 격차 확대로 인한 원화 약세 확대 전망에 힘을 보탰다는 지적도 있다. 비록 “지금은 깜빡이(금리 인하 신호)를 켤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 이라고 했지만,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이 총재 발언이 비둘기(통화 완화 선호)적 성향을 강화했다고 해석한다. 권효성 블룸버그이코노믹스 이코노미스트는 “(이 총재가) 달러 대비 원화 가치 하락에 주변국의 통화 약세 영향도 있다고 발언한 목적은 한은과 연준의 정책 금리 격차 확대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총재의 생각과 달리 이날 금융통화위원회 브리핑 도중 원·달러 환율은 치솟기 시작했다. 이날 1368원에서 거래됐던 원·달러 환율은 이 총재의 환율 발언 직후인 오전 11시 45분 급등을 시작해 단숨에 1374원으로 튀어 올랐다. 한미 금리 격차 확대 우려가 원화 약세 기대감을 높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 2700선에서 횡보했던 코스피 지수는 원·달러 환율이 튀어 오르자 2680선까지 무너졌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10.7원 오른 1375.4원으로 거래를 마쳤고, 4월 15일도 전 거래일보다 8.6원 오른 1384원으로 마감했다. 원화 환율이 4월 16일 달러당 1400원을 터치할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코스피 지수도 2670.43(4월 15일), 2609.63(4월 16일), 2584.18(4월 17일)로 후퇴했다. 

"'원화 약세·유가상승' 결합 가능성"

 원화 약세는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국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킨다. 중동발 지정학 위기로 배럴당 100달러 돌파 전망이 나오는 국제 유가 상승세와 원화 약세가 결합하는 ‘최악의 경우’가 실현되면, 지난 2~3월 두 달 연속 3%를 넘어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고착화될 수 있다. 원화로 표시한 유가는 국제 유가 상승분에 환율 상승분이 더해져 ‘이중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미국보다 먼저 금리 인하를 할 수 있다”는 이 총재 발언이 ‘공언(空言·빈말)’이 될 수 있다. 금리 인하 기본 조건인 ‘2%대 물가’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원·달러 환율 안정이 필수적이다. 

원·달러 환율 1400원이 위협받자, 이 총재의 환율, 물가 발언 톤(tone)이 달라졌다. 그는 4월 17일 미국 CNBC 방송 인터뷰에서 “펀더멘털을 고려할 때 최근 움직임이 과도하다”고 했다. 그는 물가에 대해서도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근원 물가 상승률보다 높다” 면서 “소비자물가가 여전히 끈적끈적하다”고 했다.

Plus Point

삐걱대는 이창용 총재의 ‘한국판 포워드 가이던스’

2022년 4월 임기를 시작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취임 직후부터 한국판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중앙은행이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기준금리 수준 등 미래의 통화정책 방향을 예고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인플레이션 목표 관리 같은 규칙(Rules), 경제지표 등 데이터에 근거한 정책 수행을 강조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도입했다. 제로 금리, 양적 완화 등 파격적인 유동성 공급에도, 금융시장 패닉이 진정되지 않자 국채 매입 규모 등을 미리 제시해 시장 참여자가 연준의 정책 방향에 맞춰 행동하게 했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1987년 이후 18년간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전략적 모호성’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린스펀은 자신의 화법에 대해 “급변한 경제 환경에 대응하는 정책적 재량을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했지만, 경제학계에서는 이런 접근법이 글로벌 금융 위기 배경인 2000년대 초 저금리 정책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통화정책이 시장을 이끌지 못하고, 추종했기 때문이다. 

이창용 총재의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에 대해서는 금융시장 불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총재는 2022년 7월 이후 ‘0.25%포인트 점진적 금리 인상’을 명시적으로 예고했다 10월 ‘0.5%포인트 빅스텝’으로 선회해 레고 사태 배경인 채권 금리 급등을 초래했다. 

한은 조사국장 출신 장민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당시 공개 보고서에서 “높아지는 대외 불확실성으로 인한 경제 전망의 한계 등을 고려할 때 한국은행은 통화정책 커뮤니케이션에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총재는 4월 12일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브리핑에서 “유가 안정으로 물가 상승률이 연말 2.3%로 가면 금리 인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지만, 조윤제 한은 금융통화위원은 4월 16일 간담회에서 “물가가 2% 목표 수준으로 안정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므로 서둘러 금리 인하를 할 시점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