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메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 미국 최대 호황기를 이끈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의장,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에게는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유명인이라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또 있다.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유대계 인맥은 미국 주류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해 왔다. 일례로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연준 의장 자리는 제롬 파월 현 의장 취임 전까지 40년간 유대인이 독식했다.

미국의 든든한 유대인 인맥은 굳건한 미· 이스라엘 동맹의 근간이다. 미국의 대(對)중동 관계의 또 다른 한 축은 석유 자원의 원활한 수급이라는 목적을 기반으로 유지돼 온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적대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미국을 구심점으로 한 동맹 관계에 가깝다.

이스라엘과 사우디는 최대 앙숙이 이란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사우디와 이란의 대립은 수천 년을 이어 온 종파 다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다. 사우디는 이슬람교도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주류 수니파의 종주국이다. 이란은 200여 개가 넘는 이슬람 종파 중 유일하게 수니파에대적할 수 있는 시아파(20% 미만)의 맹주다.

4월 5일 수도 테헤란에 모인 이란 시위대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4월 5일 수도 테헤란에 모인 이란 시위대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파국 치달아

수니파와 시아파는 사우디와 이란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형성, 중동 곳곳에서 분쟁을 벌이고 있다. 올해로 12년째에 접어든 시리아 내전이 대표적이다. 시리아 내전은 독재 정권 저항 움직임에서 출발했지만, 이란이 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 건설을 위해 개입하면서 종파 갈등으로 번졌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앙숙이 됐다. ‘친구의 적은 곧 나의 적’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동맹 둘과 앙숙이 된 이란과 미국의 관계 개선은 쉽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인구가 9000만 명에 달해 내수가 받쳐주고, 농업도 비교적 잘되며, 중동에서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할 만큼 제조업 기반도 갖춘 이란의 시장 매력을 감안해도 그렇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4월 13일(이하 현지시각) 이란이 이스라엘을 무인기(드론)와 미사일 300여 기로 전격 공습하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 소행으로 지목한 4월 1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 영사관 폭격으로 이란 혁명수비대(IRGC) 쿠드스군 사령관 모하메드 레자 자헤디 등 13명이 사망한 지 12일 만에 단행한 보복 공격이었다. 

이란이 직접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란은 그동안 직접적으로 군사 충돌에 나서기보단 중동 각 지역의 반(反)서방, 반이스라엘 성향 세력들을 지원해 왔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으로 불리는 헤즈볼라(레바논), 후티 반군(예멘), 바샤르 아사드 정권(시리아), 시아파 민병대(이라크) 그리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 하마스다.

하지만 두 나라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란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튀르키예에 이어 무슬림 국가로는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당시 이란은 중동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필요한 원유의 40%를 이란에서 수입했고, 그 대가로 무기와 농산물 등을 이란에 수출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가 이란의 비밀경찰 조직 사바크의 훈련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면서 두 나라의 우정은 적대 관계로 바뀌게 된다. 새롭게 탄생한 이란이슬람공화국은 미국에 등을 돌렸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과도 단교(斷交) 했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합법성도 부정했다.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적’으로 규정했고 미국이라는 ‘큰 사탄’ 옆의 ‘작은 사탄’이라고 지칭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스라엘이 이란 돕기도

그럼에도 이란·이라크 전쟁(1980~88) 중에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1500기의 미사일을 보내며 돕고 나섰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이란이었다. 이슬람 혁명으로 미국과 단교하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 사용했던 서방 무기에 대한 부품 조달과 수리가 불가능해졌고, 왕조시대 인물을 대거 숙청하는 과정에서 상당수 군인이나 군사 전문가도 함께 제거하는 바람에 군사력이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가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 기꺼이 이란의 손을 잡았다. 이란에 전투기, 미사일, 치프틴 탱크의 탄약이나 부품 등을 넘겨주고 이란에 있는 유대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조건이었다. 전쟁 초반에는 이란 수입 무기의 80%가 이스라엘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이란이 그 뒤 레바논과 예멘,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를 조직·지원하며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됐다. 1992년 아르헨티나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앞 폭탄 테러로 29명이 숨지고, 199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이스라엘·아르헨티나 친선협회 건물에서 발생한 테러로 85명이사망한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테헤란의 한 학교에서 지지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테헤란의 한 학교에서 지지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2005년 강경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이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국 간 긴장은 더 고조됐다. 그는 평소 ‘이스라엘이 지도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등 과격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가장 아픈 기억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신화’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란의 핵과 미사일 문제도 양국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란은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당선과 동시에 우라늄 농축을 재개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란의 핵 과학자 여러 명을 암살했고, 2010년에는 악성 코드를 이용해 이란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마비시키도 했다.

지난해 10월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양국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초기에는 이란의 대리 세력으로 불리는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이 이스라엘을 겨냥한 드론 공격을 가하거나, 홍해를 지나는 상선을 공격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4월 1일 이스라엘이 시라아 주재 이란 영사관을 폭격하고, 이란이 보복 공습을 감행하면서 세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유럽 내 확전 우려에 더해 중동 전쟁 가능성마저 우려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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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시아파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의 계승자를 누구로 볼 것이냐에 따라 나뉜다. 수니파는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능력 있는 자를 칼리프(무함마드 계승자)로 지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 혈통 중에서 칼리프를 내야 하며, 그중에서도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계승자로 여긴다.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

이슬람권 언론이 미국이 만들어낸 ‘악의 축(axis of evil)’에 반감을 드러내며 만든 용어. 애초에는 미국과 미국의 동맹에 반대·저항하는 국가들이라는 뜻이었으나, 점차 이란이 지원하는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들을 이르는 말로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