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칠레는 우리와 퍽 ‘먼 나라’다. 직항 항공편이 없어서 비행기를 이용해도 지구 반 바퀴를 돌아 26시간이 걸린다. 시간도, 계절도 정반대다. 하지만 경제 분야로 좁히면 칠레와 한국은 꽤 ‘가까운 나라’다. 2003년 2월 체결, 2004년 4월 발효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양국 간 거리를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칠레산 와인과 삼겹살은 한국 식생활의 일부가 됐고, 질주하는 한국산 자동차는 칠레 거리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칠레 인구는 약 2000만 명으로 큰 시장이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칠레는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하얀 석유’로 불리는 리튬 덕분이다. 리튬은 거의 모든 종류의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원자재로, 최근 전기차가 인기를 얻으며 덩달아 몸값이 높아졌다.
4월 18일 서울 중구 주한 칠레 대사관에서 마티아스 프랑케 대사를 만났다. 그는 한국산 자동차가 칠레 시장에서 세계 유수의 브랜드와 경쟁하며 신뢰도와 평판에서 높은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며, “FTA 체결로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된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또, 지금의 세계경제가 한·칠레 FTA 협상 당시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FTA 발효 20년을 맞은 올해 안에 보완 협상 마무리를 원하는 칠레 정부의 바람을 전했다.
변호사 출신인 프랑케 대사는 칠레 가톨릭대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국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22년 7월 주한 칠레 대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세계무역기구(WTO) 칠레 상임대표와 주영국 칠레 부대사 등을 역임했다.
한·칠레 FTA 체결 이후 지난 20년간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03~2023년에 두 나라의 교역액이 다섯 배 넘게 늘었다. 체결 후 20개월이 지났을 때 두 배 이상 늘었을 만큼 성과가 빨리 나타났다. 한국은 칠레의 4위 수출 시장이다. 지난해 대(對)한국 수출액은 75억달러(약 10조3000억원)였다. 한국산 제품과 서비스의 칠레 수출은 2003년 5억1700만달러(약 7000억원)에서 지난해 12억5000만달러(약 1조7000억원)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칠레 가톨릭대 국제법,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학 석사, 전 세계무역기구(WTO) 칠레 상임대표, 전 주영국 칠레 부대사 사진 이용성 기자
FTA 체결 이후 한국에서는 칠레산 와인이, 칠레에서는 한국산 자동차의 인기가 부쩍 높아졌다.
“칠레산 와인은 물량 기준으로 한국 수입 와인 중 1위를 지키고 있다. 칠레산 삼겹살도 한국에서 인기다. 한국 현대차·기아의 자동차는 칠레 시장에서 세계 유수의 브랜드와 경쟁하며 신뢰도와 평판에서 높은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칠레에는 독자적인 자동차 산업이 없기 때문에 글로벌 브랜드 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가 큰 성과다. FTA 체결로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된 것도 분명 도움 됐을 것이다.”
칠레산 와인은 수년째 수입 물량 면에서 국내 1위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전 세계 와인 생산과 수출에서 칠레가 각각 6위, 5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과 FTA 체결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볼 수 있다. 현대차·기아는 칠레 자동차 시장점유율 1위다. 지난해 8월 기준 현대차는 도요타와 제너럴모터스(GM)에 뒤진 3위였지만, 5위 기아를 합치면 월간 약 2만5000대의 판매로 도요타(1만7857대)를 훌쩍 넘는다. 한국산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그리고 세탁기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도 인기다.

칠레에서 한국과 한국 기업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는 K팝을 비롯해 전 세계적인 한류 문화 열풍도 한몫했을 것 같은데.
“1980년대에 수도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한국인이 칠레에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당시 본국(한국)과 무역을 위해 이민 온 이들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그 결과 한국 문화가 칠레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2010년대 들어 불어닥친 K팝과 K드라마 열풍은 칠레 젊은이가 한국 문화에 한층 더 익숙해지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 산티아고는 해외 투어 중인 K팝 밴드가 반드시 들러야 하는 도시가 됐다.”
한류 문화 콘텐츠 인기로 촉발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산업 분야로 옮겨갈 조짐이 보이는지 궁금하다.
“칠레에서 최근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부쩍높아졌다. 곳곳에서 한국 식당이 급격히 늘었는데, 한국 전통 음식을 바탕으로 칠레산 식재료를 사용해 현지 입맛에 맞추기 위한 노력도 눈에 띈다. 다음에는 K뷰티가 바통을 이어받을 것 같다. 이미 한국의 관련 기업 몇 곳이 칠레 쇼핑몰에 입점했다. 앞으로 관련 분야 한국 기업이 더 많이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에 칠레 한류의 다음 진원지는 바이오 의약품 같은 첨단 기술이 될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리튬 강국 칠레의 위상도 높아졌다.
“칠레는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40%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 생산량의 24%를 담당해, 이 부문 1위다. 칠레에서 현재 리튬 상업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아타카마 함수호뿐이지만, 칠레에는 화학·지질학적 특성이 다양한 함수호가 45개 더 있다. 칠레 정부는 리튬을 비롯한 주요 광물 생산과 유통에서 칠레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산업의 성장을 돕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해 리튬 국가 정책을 발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국가 차원의 리튬 전략 핵심은 뭔가.
“칠레 리튬 산업의 성장과 개발을 위해 정부와 민간 부문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정부 참여는 칠레 국영 광업 기업이자 세계 최대 구리 생산 기업 중 하나인 코델코(Codel-co)와 칠레광물공사(Enami)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 경제성장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환경과 정치·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이 되도록 지역사회와 전문가도 참여한다. 칠레 정부는 칠레 리튬 자원에 관심 있는 한국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언젠가 칠레 리튬 생태계의 일부가 되길 바라며, 그들과 협력을 계속할 것이다.”
현재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는 탄산리튬을 가공해 만든 수산화리튬으로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탄산리튬 수입량 대부분을 칠레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앞서 칠레 리튬 생산 업체 SQM은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과 리튬 장기 구매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한·칠레 FTA를 보완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지금의 세계경제는 (한·칠레 FTA 협상을 진행했던) 21세기 초반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무역에서 중소기업의 역할과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성이 커졌고, 생산과 교역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 고려해야 할 것도 늘었다. 이런 이유로 양국 정부는 2018년에 기존 FTA를 보완하기로 합의했다. 칠레 정부는 보완 관련 합의를 연내에 마무리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FTA 체결 20주년을 두 나라가 함께 축하하는 최고의 이벤트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앞으로 어떤 칠레 수입품을 더 많이 보고 싶은가. 반대로 칠레에 소개하고 싶은 한국 수출품이 있다면.
“첫 FTA 합의에서 제외된 칠레산 농산물이 한국에 많이 들어오길 바란다. 칠레는 농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칠레와 FTA 체결 이후 한국은 (FTA를 체결한) 다른 나라에도 특혜를 줬다.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고 한국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무역 관련 주한 칠레 대사관의 업무 초점은 칠레산 상품의 한국 수출을 돕는 것이지만, 한국 상품의 칠레 수출에 관해 의견을 내기도 한다. 한국산 김과 감, 육류, 일부 해산물은 칠레 소비자가 매우 좋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