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발효된 한·칠레 FTA를 시작으로 현재 한국은 총 59개국과 21건의 FTA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85%에 이른다. 주요 교역국 가운데 이 정도 FTA 네트워크를 갖춘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통상교섭본부 본부장은 한국의 첫 FTA 발효 20주년을 맞아 최근 이뤄진 인터뷰에서 “미·중 패권 경쟁 심화, 자유무역 퇴조 등 국제 통상 환경이 급변하고 있지만 탄탄한 FTA 네트워크가보호막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아·태 무역 자유화 효과’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정 본부장은 1995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FTA 연구자로 발탁된 데 이어 인하대에서 교편을 잡으며 한국 통상 정책의 브레인 역할을 해온 국제 통상, FTA, 경제 안보 분야 전문가다.
30여 년간 통상 정책을 연구하고 설계해 온 전문가가 올 1월 통상 현장 사령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취임 일성으로 ‘통상 정책과 경제 안보의 조화, 공급망 안정, 새로운 시장 창출’을 강조했다.


2024년 한국의 첫 FTA인 칠레와 FTA를 발효한 지 20년이 지났다.
“한·칠레 FTA는 연구부터 협상, 국회 비준까지 전 프로세스에 관여했다. 당시 FTA에 농업계 반대가 있어 국회를 오가며 대책 수립에도 참여해, 애착이 큰 협정이다. 한국의 첫 FTA로 FTA 정책이 자리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부가 FTA를 논의한다는 말만 나와도 기업이 해당국에서 할 비즈니스를 찾는 동기를 부여했다. 한·칠레 FTA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FTA 20년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2003년 한국 FTA 정책 로드맵을 연구해 발표했는데, 정부가 채택했다. 그렇게 수립된 로드맵의 FTA 목표(체결 국가 수)를 초과 달성했다. 국내외적으로 한국의 FTA 정책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미국· 유럽연합(EU)·중국 등 거대 경제권을 포함해 총 59개국과 21건의 FTA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 세계 GDP 85%에 이르는 경제 영토를 확보했다. 주요 교역국 가운데 이 정도 FTA 네트워크를 갖춘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칠레 FTA 체결 전 한국의 전 세계 대상 수출액은 약 1940억달러(약 266조원)였는데, 2023년 수출액은 6320억달러(약 869조원)로 증가했다.
걸프협력이사회(GCC)를 비롯해 중동, 남미 지역과 FTA를 타결했는데, 의미와 성과는.
“지난 20년 동안 FTA 정책을 펼치면서 한국과 FTA 체결에 관심 있는 국가와는 사실상 거의 마무리했다. 그중 FTA 협상이 잘 진전되지 않았던 곳이 중동 지역이다. 지난해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쿠웨이트·카타르·바레인·오만 등 중동 6국 경제협력체인 걸프협력이사회(GCC)와 FTA를 타결했다. UAE와는 별도로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을 체결했다. 중동 지역은 우리 산업의 필수 원자재인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원으로 그리고 자동차·가전 등 공산품의 소비처로서 우리와 오랜 협력 관계를 이어왔다.
남미도 그동안 협상이 어려웠는데, 지난해 한·에콰도르 전략적경제협력협정(SECA), 과테말라의 한·중미 FTA 가입 협상까지 이뤄냈다. 특히 GCC와 FTA 타결은 윤석열 정부 들어 대중동 정책을 강화한 게 효과를 냈다. 이른바 신(新)중동 정책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중동 순방에 나섰고 FTA 협상 논의의 물꼬를 텄다.”

한양대 경제학,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제학 박사, 전 인하대 국제 통상학부 교수·대외부총장, 전 한국국제통상학회 회장, 전 한국협상학회 회장, 전 국민경제자문회의 경제 안보 분과장, 전 전략물자관리원 원장
최근 전 세계에서 자유무역을 막는 보호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FTA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자유무역 퇴조, 자국 이기주의 강화 등이 세계적인 추세가 됐고,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도 국제적으로 약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WTO로 대변되는 자유무역 질서가 더욱 흔들린다면 그에 따른 시장 개방 약속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문제는 WTO 체제에 대한 도전 측면으로 볼 수 있고, FTA는 양자 간 협정이다. 때문에 서로 피해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FTA를 철폐하려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WTO 체제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게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세계경제의 85%를 커버하는 FTA 네트워크를 구축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WTO 체제가 흔들려도 일종의 보호막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이 취한 조치(인플레이션 감축법 등)를 보면 FTA 대상국을 예외로 하는 경우가 꽤 있다.”
미·중 갈등이 최대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 통상에 미치는 영향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부진한 배경에는 자국 내수를 바탕으로 독자 공급망을 구축하는, 이른바 중국의 ‘쌍순환 정책’이라든가 중국 기업의 성장도 있겠지만, 미·중 갈등의 후폭풍도 분명히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미·중 갈등의 핵심이 첨단 산업으로 가고 있고, 이를 우리가 주의해야겠지만 동시에 중국과 거래, 전반적인 경제협력과 투자는 지속해야 한다. 미·중 갈등 과정에서 주요 7개국(G7)이 중국에 대한 정책으로 (적대적인)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을 채택한 것도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중국과 무역 비중이 높아 대중 관계를 원만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외교· 통상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정부의 통상협정 추진 방향은.
“우선 경제 안보와 공급망 안정이다. 과거에는 경제 문제만 생각하면 됐는데, 지금은 경제와 안보를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두 번째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남반구나 북반구 저위도에 위치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국제 인식이 개선되고, 이들 국가의 산업화와 수출 시장으로서 잠재력이 빠르게 커지고 있어 이들 국가와 통상 협력을 빨리 갖춰야 한다. 셋째는 전 세계에서 아직 우리와 FTA를 체결하지 않은 15%에 해당하는 국가와 통상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이들 국가는 일반적인 FTA를 하기에는 여건이 안 좋은 경우가 많아 EPA(경제동반자협정), TIPF(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 등으로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상대국에 따라 맞춤형 FTA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국내 산업을 위해 규제할 때 통상 이슈로 제기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각 부처에서 새로운 정책을 기안할 때 국제 통상 관점에서 평가하고, 통상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 조처를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keyword
EPA(경제동반자협정) FTA같이 관세 철폐 등 시장 개방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상대국과 공동 번영을 목적으로 협력 요소를 강조한 통상협정. 한국 정부는 몽골, 조지아와 EPA 협상을 진행 중이고, 향후 태국, 케냐, 모로코 등 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 등지의 8개국과 협상을 추진할 계획이다.
TIPF(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 비구속적 양해각서(MOU)로 양국 간 산업, 통상 여건에 맞춰 공급망, 무역과 투자, 기술 등 상호 호혜적인 협력을 추진하는 협정. 한국 정부는 우즈베키스탄, 브라질 등 14개국과 체결했으며, 아프리카, 남아시아, 중남미 등지의 26개국과 체결을 협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