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윙 보트’ 속 장면. 사진 IMDB
영화 ‘스윙 보트’ 속 장면. 사진 IMDB

또 한 번의 선거 태풍이 지나갔다. 정치에 관심도 없고 당의 정책이나 후보의 공약도 모른다던 친구는 아파트 단지에 정전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달려왔던 현역 의원, 지인의 소개로 함께 술자리를 했을 때 착해 보였다던 사람을 찍었다고 한다. 일반 유권자의 선택이란 정치적 비전보다 매체에서 본 이미지나 사적인 관계에 의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에 크게 좌우된다.

이혼 후 딸 몰리를 혼자 키우는 버드 존슨은 뉴멕시코주의 작은 마을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단순 근로자다. 대통령 선거일, 사람들은 투표소로 몰려가는데 그는 정치 따윈 쓸모없다며 술집으로 간다. 지금껏 그의 인생에 깊이 팬 주름을 펴준 대통령이 있었던가. 해고까지 당한 그날, 존슨은 투표소에서 몰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잊고 술을 마신다. 

철없는 부모 밑에서 생존하려면 아이는 일찌감치 애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몰리도 똑똑하고 속 깊은 아이지만 아직은 열두 살, 부모가 투표하는 현장을 참관하고 후기를 쓰는숙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새삼 아빠도 밉고 엄마 없는 설움도 밀려든다. 몰리는 관리인 몰래 선거인명부에서 아빠 이름을 찾아 거짓 서명하고 투표용지를 훔쳐 기표소에 들어간다.

미국은 유권자가 뽑은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다. 각주에 배정된 538명의 선거인단 중 과반이 넘는 270명을 얻은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선거인단을 뽑는 날이다. 그런데 개표 결과 269 대 269. 누구도 승기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동점이 나온 뉴멕시코주의 작은 마을이 뉴스의 중심에 놓이는 사태가 벌어진다.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존슨의 집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찾아오고 언론사 기자와 유명 방송사 카메라가 몰려든다. 몰리 덕에 선거에 참여한 것처럼 되어버린 존슨의 표가 기기 에러로 누굴 찍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사실을 말할 수 없던 존슨은 열흘 뒤 재투표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의 선택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두 후보는 존슨, 단 한 사람의 표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정치란 이기고 봐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의 결과물이 되기 쉽다. 두 후보 진영은 존슨에게 호감을 살 방법, 그의 마음을 얻을 길을 모색한다. 존슨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 공화당은 그동안 주장해 온 기업의 발전, 사유재산과 개인의 자유, 생명 존중의 가치를 저버리고, 민주당도 환경보호, 낙태 선택권, 난민 수용 등 다양성 존중의 원칙을 내던진다.

영화 ‘스윙 보트’ 속 장면. 사진 IMDB
영화 ‘스윙 보트’ 속 장면. 사진 IMDB

“웃고 춤추고 표를 사는 거죠. 늘 하던 일이잖아”라고 말하는 선거 참모에게 영화는 소신 없는 정책의 책임을 미루는 듯 보이지만 승리를 위한 잠깐의 연기 변신이라 해도, 신념을 버리고 사안을 승인하고 대중 앞에서 공약하는 건 정치인 자신이다.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것도 정치인 본인이다. 

선거철에만 유권자 앞에 머리 숙이고 엎드려 큰절까지 하는 정치인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단 한 명의 유권자 말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얻으려는 영화 속 정치인, 대통령 후보들의 모습이 썩 밉지만은 않다. 그러나 오로지 표를 얻겠다는 이유로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바꾸는 것은 정치인이 보이지 말아야 할 최악의 모습이다.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세상의 관심에 존슨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용기에 초대받아 대통령과 맥주를 마시며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자, 우쭐해진다. 야당 후보도 그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고 록밴드 리더의 꿈도 잠시나마 되찾아 준다. 동네는 축제 분위기에 들썩이고 친구와 이웃은 유명 스타를 대하듯 그를 추켜세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투표가 엄중한 사회적 약속이라고 믿고 있던 몰리는 어른들의 한심한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치인이 아빠의 환심을 사려고 쩔쩔매는 것도 우습고, 빤히 보이는 속셈을 모르고 그들이 내미는 선물마다 좋다고 헤벌쭉 웃는 아빠도 바보 같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정치는 초등학교에서 다 배웠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서 계산하고 타협하며 이익을 좇느라 원칙을 모두 잃어버렸을 뿐. 

학부모 수업 참관일, 이쪽저쪽으로 불려 다니느라 지친 아빠가 또 약속을 어기자 몰리는 다시 서럽고 두려워진다. 이 모든 사태는 자신이 부정투표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만약 사실이 드러나면 아빠와 자신은 어떻게 될까? 

정치인만 거짓말을 잘하는 건 아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아동복지국에서 둘을 갈라놓으려 온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떨던 존슨과 몰리도 거짓말과 불법에 익숙하다. 몰리가 차를 운전해서 술주정뱅이 아빠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도 다반사이지만 코믹의 옷을 입은 영화는 깜찍한 불법을 애틋한 시선으로 사면해 준다. 몰리는 진실을 털어놓지만, 기자가 특종을 포기하고 부녀의 비밀을 지키게 하는 것도 아이에게 주는 면죄부다.

현실 속 정치인과는 달리, 갈팡질팡하던 후보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서 이겨야 하는가, 고민하며 본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누구에게 투표할지 정하지 못한 부동층, 스윙 보트(swing vote)였던 존슨 역시 낯선 세간의 관심, 선정적인 언론의 포화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자문하고 몰리와 함께 그 의미를 찾아낸다.

존슨 역의 케빈 코스트너가 2008년에 제작, 발표한 ‘스윙 보트’는 훈계하지 않으면서도 선거가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인기투표가 아니라는 것,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정치인과 유권자가 함께 성장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걸 좌충우돌,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가족영화다.

누굴 뽑든, 앞으로도 정치가 존슨의 삶을 크게 바꾸진 않을 것 같다. 대통령이 실정하면 왜 그때 어리석게 그를 뽑았느냐고, 온 국민의 원성을 살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잘하든 못하든 그 책임은 정치인의 몫이다. 유권자란 수없이 실망하면서도 선출된 정치인이 잘해주기를 바라며 믿고 맡길 뿐, 선거가 끝나면 정치를 잊고 저마다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