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멘토’. 사진 네이버영화
영화 ‘메멘토’. 사진 네이버영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는 아내의 복수를 위해 살인범을 추적하는 주인공 레너드의 이야기다. 아내의 참혹한 사고를 목격한 후, 레너드는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단기 기억상실증에 시달린다. 그는 사고 이전의 기억은 유지하지만,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은 상실한다. 1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잊는 레너드의 상태는 미지의 인물을 쫓는 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는 10분마다 당장 곁에 있는 인물이 원래 알던 사람인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시간의 개념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세계에서 레너드가 기억을 잡아매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기록이다. 중요한 장소와 인물들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고 필요한 정보를 메모한다. 그러나 사진과 메모 역시 변형과 삭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범인을 찾기 위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단서는 레너드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진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자아와 세계를 관계 맺는 문신

감독은 이야기를 결말부터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하여 관객을 레너드의 불확실성에 동참하게 한다. 이 방식은 새로운 인물과 사건이 나타날 때마다 관객도 레너드처럼 상황을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컬러로 표현된 역순 장면에 더해, 반대로 이야기의 시작점부터 시간의 정방향으로 흐르는 흑백 장면이 평행하게 전개된다. 이와 같이 진행 방향이 다른 두 이야기가 서로 교차해 전개되면서 관객의 혼란은 가중된다. 두 방향성의 시간은 결국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서로 충돌하며, 동일한 시점에서 흑백이 컬러 화면으로 전환된다. 엔딩 장면의 시점이 전체 이야기 시간 축의 중간 지점이 되는 셈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뒤섞인 시간의 개념은 비논리적이고,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 개인의 기억 행위와 닮았다. 레너드는 문신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고 눈앞의 상황을 파악한다. 그가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미래의 자신에게 현재의 나를 알리기 위해서다. 

공간을 에워싸는 피복  

영화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 완성된 건축물은 유동하는 세계 속에 그대로 노출된다. 흘러가는 시간과 불특정 다수의 기억이 지속해서 중첩되는 상황에서 건축물은 외부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건축의 요소 중 신체의 피부나 나무의 껍질처럼 외부 세계와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외부 표면이 주요 수단으로 기능한다. 구조적 골조로 구축되는 건축에서 외부 표면은 자칫 부차적이고 피상적인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독일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는 ‘피복 이론’에서 건축의 본질이 공간을 ‘에워싸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건축의 기원은 외부 환경의 일부를 의복처럼 감싸면서 내부 공간을 구분하고 보호하는 벽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건축의 피복은 기둥, 보 같은 구조적 프레임에 선행하며, 건축가는 이를 통해 의도하는 예술적인 인상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에버스발데 기술학교 도서관. 사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에버스발데 기술학교 도서관. 사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건축의 피복 이미지

1999년 완성된 독일의 ‘에버스발데 기술학교 도서관’은 고유한 이미지의 피복을 통해 세계와 대화하면서 젬퍼의 이론을 계승한다. 이 프로젝트에서 스위스 건축가 헤르초크 앤드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은 박스 형태 건물의 외피를 17개의 수평 밴드로 분할했다. 이 중 14개의 밴드는 콘크리트 패널로 마감하고, 나머지 3개의 밴드에는 유리를 적용하여 수평적인 리듬을 형성했다. 각 밴드에는 1.5m 너비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옆으로 펼친 필름을 연상시킨다. 이미지는 박스의 네 면을 돌며 66번 반복되면서 전체 건축물이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도록 한다. 이를 통해 건축물의 정면, 측면 같은 관습적 구분이 사라지고, 수평으로 분할된 유리와 콘크리트 사이의 대비되는 물성도 완화됐다. 또한, 콘크리트와 유리 밴드에 다르게 적용된 높이와 하나 이상의 밴드에 걸쳐진 몇몇 이미지는 외피의 수평적 질서에 수직적인 리듬을 추가했다. 이 과정을 거쳐 총 3개 층의 도서관 내부 공간을 에워싸며 정의하는 균질한 삼차원의 피복이 형성됐다. 

재료의 물성으로 새긴 문신

도서관 외피의 이미지는 독일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Thomas Ruff)가 선별했다. 그는 도서관이 역사와 사회적 인식의 발전을 위해 지식을 제공하는 공공장소임을 고려하여 일상적인 신문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선택된 이미지는 로렌초 로토의 회화부터 독일의 역사적, 정치적 장면 그리고 기술의 진보를 상징하는 비행기와 기차의 사진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건축가는 선정된 이미지를 콘크리트 패널에 새기기 위해 이질적인 염료 대신, 재료의 물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응용하여 사진 이미지를 다공의 필름으로 변형하고, 어둡게 표현되어야 하는 영역에 잉크 대신 콘크리트 경화 지연제를 발랐다. 주물 틀에 필름을 넣고 콘크리트를 부은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연제와 접촉하지 않은 부분만 완벽하게 경화된다. 이후, 살수기로 물을 뿌려 지연제와 접촉했던 부분들을 씻어 낸다. 이 과정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밝고 매끈한 표면 사이로 어둡고 거친 골재의 표면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콘크리트 패널 위로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건축의 피복을 통한 상호작용

도서관 박스는 피복에 새겨진 이미지를 통해 경험자와 상호작용을 한다. 멀리서 볼 때 개별 이미지 정보는 사라지고, 도서관은 여러 패턴이 중첩된 추상적인 박스로 인식된다. 경험자는 점진적으로 건물에 접근하면서 이미지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눈앞에 전개된 표면에서 자유롭게 수평, 수직, 대각선의 방향으로 이미지를 취합하는 경험자의 시선은 마치 여러 분야의 서적들 사이를 배회하는 도서관 내부의 경험과 유사하다.  

재료의 물성을 중심에 둔 피복의 표면은 시간에 따라 외부와 내부 환경을 다채롭게 투영한다. 낮에는 유리면에 반사된 외부 풍경이 이미지들과 중첩되며, 패널 크기를 따라 규칙적으로 배치된 창문들이 시선을 내부로 이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콘크리트 패널의 매끄럽고 거친 질감의 대조가 더욱 강조되어 인쇄판의 표면을 연상케 한다. 저녁에는 피복의 유리면 밴드와 창을 통해 조명이 켜진 내부 풍경이 외부로 발산되고, 그 위로 이미지들이 부유한다. 

에버스발데 기술학교 도서관은 피복을 통해 내면을 드러내고, 세계와 타인과 만난다. 개인의 기억은 주관적이고 왜곡될 수 있지만, 건축물은 모든 기억을 포용해 자신의 이미지로 수렴한다. 피복은 세계와 소통하려는 건축의 태도를 반영하며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