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현대사(史)의 위인 중 한 분인 한양대 설립자 백남 김연준 선생의 일생을 되새겨 보았다. 백남 선생은 1914년 2월 함북 명천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 선생이 전 생애를 통해 매진한 두 가지 열정은 ‘음악’과 ‘육영사업’이었다. 육영사업에 대한 관심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그의 고향 명천엔 항일 독립운동가가 많았고, 그 애국정신이 교육열로 이어져 학교를 많이 설립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아름답고 숭고한 사업으로 여기게 됐다고 한다.

한양대 설립자 백남 김연준 선생. 사진 한양대
한양대 설립자 백남 김연준 선생. 사진 한양대

백남 선생은 1929년 함북 유일 공립 고등보통학교인 명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음악을 통해 민족운동을 하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일제의 엄혹한 시기에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가는 꿈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라를 위한 다른 현실적인 방안으로 과학기술 교육의 꿈을 실천했다. 연희전문대학을 졸업한 1939년 비교적 실습 기자재가 적게 드는 토목, 건축, 광산과의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으나, 일제 말 여러 규제로 1944년 9월 폐교했다. 그리고 1942년 4월 조선 유일의 야간 교육 전문 기관인 동아고등공업학원을 설립했으나 역시 1944년 3월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광복하자마자 1945년 10월 건국기술학교를 개교했다. 이를 다시 건국기술전문학교로 개명하고, 한양야간공업대학관으로 승계한 후 마침내 1948년 7월 한양공과대학으로 승격시켰다. 결국 1939년에 설립한 2년제 동아공과학원 이후 10년 만에 국내 유일의 민립 공과대학을 설립했다. 이는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이라는 뜻을 세우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과를 만들어 내는 선생의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준다. 

그 후 한국전쟁 동안 부산에서의 전시연합대학 천막 교육을 거쳐 서울로 복귀했으나 신당동 교사가 화재로 전소되는 막막함을 겪는다. 수업할 수 있는 강의실이 없어서 떠돌다가 마침내 1953년 행당산 33만㎡(10만 평) 돌산공원 부지를 불하받아 현재 한양대 터전을 확보하게 된다. 모든 일이 난관에 부딪혀 사방이 어둠으로 캄캄할 때면 선생은 ‘이제는 나를 믿는 수밖에는 없다’고 했다. 위인의 담대한 자기 확신을 보여준다.

백남 선생은 한양대 건학 정신인 ‘사랑의 실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이는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철학적인 의미가 강하다. 내 부모님의 정신적인 자산에 나의 인생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사랑의 실천의 ‘사랑’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현세의 사랑을 내세의 천국과 천당으로 보답받는 구원사적인 전제가 없다. 그러니 종교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의 실천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세에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고매한 정신을 널리 펴는 교육 사회운동이다.

신동우 나노 회장
케임브리지대 이학 박사, 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신동우 나노 회장
케임브리지대 이학 박사, 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그 실천 덕목은 근면, 정직, 겸손, 봉사다.” 

백남 선생이 자서전을 쓰던 1999년 한 언론사 대학 평가에서 한양대가 ‘인성과 품성’ 에서 전국 1위를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의 평생의 신념과 한양의 학풍이 하나 된 결과” 라며 감격해했다. 

선생은 자서전에서 “내 마음속에는 학교에 대한 것만 꽉 차 있고, 내 눈에는 학교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신발 한 켤레, 양복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왔다. 돈이 생기면 한 푼이라도 재단에 넣었다”고 했다. 그 결실인 한양대 졸업생은 대한민국 산업화 시대 현장 책임자로서 큰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기업 최고경영자(CEO) 수에서도 다른 대학에 크게 앞선다.

백남 선생의 고귀한 교육철학과 굳은 실천은 생전에 우리나라 산업화를 위한 인재뿐 아니라 사후에도 조화롭고 아름다운 미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랑의 실천자를 키우고 있다. 위인은 생전의 업적이 사후에도 점점 빛을 더해 이처럼 세상을 더 밝게 비추는 힘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