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모든 사람이 다 섹시해 보여/그리고 난 언덕 위 괴물이지/같이 놀기엔 너무 거대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도시 쪽으로 휘청대며 다가가는데/심장을 꿰뚫려도 죽지도 않지’(테일러 스위프트의 대표곡 ‘An-ti-Hero’ 가사 일부)
자신의 노래 ‘Anti-Hero’에서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스로를 괴물로 묘사한다. 180㎝ 키에 늘씬한 금발 미녀, 살아있는 바비 인형으로도 불리는 미국의 연인(Ameri-can Sweetheart)은 왜 자신을 고질라 같은 괴수에 비유했을까. 정상에 선 자는 외롭기 마련이다. ‘영 앤드 리치’는 옥에 묻은 작은 티만으로도 질타받기 쉽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미국의 국민 여동생에서 미국의 연인으로 성장했고 이젠 팝계 괴물의 위치에 올라섰다. 산업적으로 보면 긍정적 의미의 괴물, 거물이다. 온갖 기록을 깨고 또 깨며 전진 중인 스위프트는 가히 팝 산업의 쇄빙선이다.
새 앨범 수록 14곡 빌보드 1~14위 점거 기염
스위프트는 최근 또 하나의 신기록을 추가했다. 4월 19일(이하 현지시각) 발표한 새 앨범이자 정규 11집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의 수록곡 14곡 전곡으로 ‘빌보드 핫100(종합 싱글차트)’의 1위부터 14위까지를 점거한 것이다. 지난번 앨범인 ‘Mid-nights’로 같은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를 줄 세우더니 이번에 자기 기록을 자신이 넘어선 것이다. 종합 앨범차트인 ‘빌보드 200’의 정상을 밟은 것은 물론이다. 스위프트는 이전까지 무려 13장의 앨범을 ‘빌보드 200’ 1위에 올렸다. 14번째 1위다. 팝계에서 히말라야 14좌 완등 이상의 기록이다.
1989년생인 스위프트는 16세이던 2006년 1집 ‘Taylor Swift’로 데뷔했다. 미국인은 컨트리 장르를 10대 소녀가 들고나온 것에 이미 환호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트로트 사랑보다 더 끔찍한 것이 미국인의 컨트리 사랑이니 말이다. 그러나 몇 장의 앨범으로 남녀노소의 사랑을 획득한 이 미국의 국민 여동생은 대견한 ‘컨트리 팝 스타’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시원시원한 트워킹 댄스를 뮤직비디오에 전진 배치한 ‘Shake It Off(2014년)’ 는 스위프트의 대변신을 상징했고 그 곡을 담은 앨범 ‘1989’는 ‘컨트리 떼고 팝 스타’로 스위프트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전작 ‘Red(2012년)’부터 프로듀서로 가담한 스웨덴 출신의 팝 연금술사 맥스 마틴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가장 믿음직한 작곡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잭 안토노프까지 합세한 ‘1989’ 는 스위프트의 ‘신약성서’ 같은 작품이다. 일렉트로닉 팝까지 껴안은 스위프트의 ‘러브콜’에 대서양 연안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미국의 가가호호가 수화기를, 아니 앨범을 집어 들고 스트리밍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스위프트는 준수한 일렉트로닉 팝 앨범을 몇 장 더 냈고, 근년에는 인디펜던트 모던 포크 장르의 진중한 분위기와 품격까지 음반의 팔레트로 활용하면서 21세기 조니 미첼이 되려는 듯한 행보를 보인다.
지난해 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를 ‘올해의 인물’로 파격 발탁한 데는 지난해 시작한 그의 새로운 월드투어 시리즈 ‘The Eras Tour’가 결정적 원인이 됐다. 안 그래도 인기 많은 스위프트가 대규모 물량을 쏟아부어 모든 앨범의 주요 곡을 3시간 넘게 소화하는 일종의 ‘그레이티스트 히츠 투어’를 한다는 소식에 스위프트 열성팬은 물론 일반 팬까지 예매 전쟁에 뛰어들었다. 투어의 규모는 전설적 선배들인 이글스나 롤링스톤스의 기록을 깼고, 시작하기도 전에 역대 팝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 티켓 판매 최고액 기록을 경신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위상은 ‘핵개인’의 시대에도 아랑곳없다. 여전히 희귀종 괴수, 국민 가수다. 지난해 미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자. 미국 성인의 53%가 그녀의 팬이라고 응답했다. 스위프트 팬이라고 답한 설문 응답자를 뜯어보면 성비도 남성 48%, 여성 52%로 고른 편이다. 방탄소년단의 ‘아미’에 해당하는 열성 팬덤, 스위프티(Swiftie)까지는 아니지만 준(準)스위프티, 잠재 스위프티가 스위프트 신드롬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는 셈이다.
스위프트의 인기 저변은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인 스포티파이가 매일 숫자로 확인해 준다. 전 세계 약 5억 명의 구독자를 가진 스포티파이는 아티스트 페이지마다 월간 청취자 수를 표시하는데, 최근 한 달간 전 세계에서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를 한 번이라도 재생한 사람이 약 1억1380만 명이다. 장르 불문, 국적 불문 전 세계 아티스트 중 1위다. 참고로 방탄소년단은 170위권, 블랙핑크는 420위권이다.
스위프티의 구성도 흥미롭다. 설문 응답자 16%가 스스로를 열성팬이라 답했는데, 열성팬이라고 답한 응답자군의 44%만이 스스로를 ‘스위프티’로 일컬었다. 스위프트 열성팬의 다수를 점하는 45%는 27세부터 42세 사이의 밀레니얼 세대다. 베이비붐 세대가 23%로 다음으로 많다. 21%는 X 세대. 뜻밖에 Z 세대는 열 명 중 한 명꼴인 약 11%에 불과하다. ‘스위프트 제너레이션’은 16세에 데뷔한 스위프트를 17년 가까이 팔로우하면서 경제력과 인구 파워를 가지게 됐다.
스위프트의 대규모 투어가 낳은 경제 효과를 가리키는 신조어, 테일러노믹스를 만들어낸 데도 스위프티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단순한 대중적 인기를 넘어 세상이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 말이다.
'캐러밴형' 팬덤이 여행 트렌드도 바꿔
스위프트는 지난해 8월까지 진행된 1차 미국 투어에서만 관객 300만여 명을 동원하며 티켓 수입만 1조원을 넘겼을 것으로 추산된다. 더욱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팬덤이 공연 열리는 도시의 숙박, 관광 등 여러 경기를 부양시키면서 테일러노믹스, 스위프트노믹스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뉴욕타임스(NYT)는 스위프트 콘서트가 북미에서만 약 46억달러(약 6조원)의 경제 효과를 거뒀다고 분석했다. 호텔, 레스토랑, 카페를 비롯한 여러 업계가 스위프트가 올 때마다 신메뉴나 새로운 패키지 상품을 내놓고 팬덤이 이를 소비한다. 이렇다 보니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경기 동향 보고서에도 등장했을 정도다. 이번 투어 공연 일부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디 에라스 투어’는 전 세계에서 7108만달러(약 921억원)를 벌어들이며 역대 콘서트 필름 사상 최고 매출을 기록했으며 지난해 모든 영화(일반 영화 포함)를 통틀어 19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7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공연에서는 관객 7만 명의 움직임으로 규모 2.3의 지진까지 발생해 화제가 됐다.
바야흐로 무료에 가까운 수많은 콘텐츠를 쇼트폼으로 소비하는 스낵 컬처의 시대다. 그럼에도 불편을 감수하며 스위프트의 투어를 따라다니고 지갑을 기꺼이 여는 코어 팬덤을 대규모로 일궈낸 것이야말로 테일러노믹스의 승리다. ‘슈퍼 팬 비즈니스’의 파워는 K팝 신드롬의 양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CNN 트래블’은 테일러노믹스가 여행 트렌드도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만 명의 열성팬이 도시마다 쫓아다니기 때문에 관광 경제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거기 살며 앉아서 기다리는 ‘웰컴형’ 팬덤이 아니라 어딜 가든 쫓아다니는 ‘캐러밴형’ 팬덤이 스위프트노믹스를 만든 셈이다.
이쯤 되면, 어떤가. ‘심장을 꿰뚫려도 죽지 않는’ 괴물, 노래 ‘Anti-Hero’ 속 스위프트의 뒤틀린 자화상 같은 괴수는 더 이상 스위프트 본인만을 가리키지 않는 듯하다. 스위프트 관련 상품을 아무리 소비해도 물리지 않는 슈퍼 팬과 라이트 팬을 함께 가리켜도 이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