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프랑스는 경제적 관점에서 유럽의 병자(sick man)로 여겨져 왔다. 견실한 성장을 이어가던 이웃 나라 독일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의 높은 실업률, 낮은 경제성장률은 대조적이었다. 유럽 최고의 소득세율, 공기업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노조의 존재,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끝없는 요구는 프랑스의 미래가 어두울 것으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프랑스는 크게 달라졌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서 프랑스는 독일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비해 과감한 보조금과 대출을 제공함으로써 가계와 기업의 소비 및 투자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코로나19 이후 관광객이 복귀하자 여행업 비중이 큰 프랑스 경제가 큰 혜택을 본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17년 취임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진행해 온 법인세 인하, 노동시장 자유화, 규제 개혁, 실업 보험 개혁 및 연금 개혁 등이 큰 논란 속에서도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프랑스의 지속적인 성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지속 가능한 추세로 여겨졌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유럽의 핵심 국가로 자리 잡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많은 전쟁과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프랑스가 유럽의 평화와 발전을 이끌어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경제적으로 보면 독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명품과 같은 고가 소비재 분야에서 프랑스 기업의 경쟁력은 독보적이다. 그랑제콜로 대표되는 엘리트 교육 시스템은 국가적으로 필요한 핵심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 독자적인 핵무장, 라팔 전투기로 대표되는 첨단 군사기술을 보유한 프랑스는 과거 냉전 시절부터 지금까지 미국에 일방적으로 협조하기보다는 균형자 입장을 토대로 독자 노선을 걸어왔다. 한편으로는 과거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계속 유지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주도해 형성한유럽연합(EU)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이익과 영향력을 지켜주는 핵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EU의 약화가 본격화하면서 프랑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 핵 위협에 흔들리는 유럽 평화
프랑스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유럽의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마크롱 대통령은 소르본대 연설에서 ‘유럽은 죽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점증하는 안보 위협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한 것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현실적인 유럽 안보의 위협이다. 1975년 헬싱키 조약 이후 유럽의 기본을 유지하던 기존 국경 유지 및 힘에 의한 현상 변경 금지 원칙은 한순간에 폐기됐다. 러시아의 핵 위협이 다시 등장하면서 1980년대 핵전쟁의 공포가 21세기에 부활하고 있다. 러시아의 공세가 우크라이나에서 끝날 것이라고 믿는 유럽인은 많지 않다. 다음이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될지, 폴란드, 루마니아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커지고 있다. 지난 2월 마크롱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파병 발언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유럽 지역의 GDP는 1.5배 성장했는데 복지에 투입되는 예산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국방비의 삭감을 통해 만들어진 평화 배당을 유럽은 30년 동안 누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미국이 유럽에 대해 요구했던GDP 대비 2% 국방비 지출은 이제 새로운 표준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국가는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유럽 대륙에서의 국가 간 전면전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미국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를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유럽에 의한 자체 방위는 20년째 논의되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미국과 격차 확대 역시 프랑스를 두렵게 하고 있다. 2022년 미국의 1인당 평균 임금수준은 7만7463달러에 달하는 데 비해 독일은 5만8940달러, 프랑스는 5만2764달러에 그치고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강국인 두 나라의 1인당 임금수준이 미국의 76%, 68%에 불과한 것이다. 범위를 EU로 넓혀도 상황은 좋지 않다. 2022년 미국의 GDP는 25조4645억달러(약 3경4575조6981억원)인데 EU는 16조6426억달러(약 2경2597조3223억원)에 그쳤다. EU의 GDP는 미국의 65.4% 수준이다. 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이라는 구도가 점점 고착화되는 것에 대해 프랑스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태양광 패널, 이차전지, 전기차로 이루어진 고부가가치 상품의 대유럽 수출을 크게 확대해 가고 있다. 미국으로의 수출이 각종 무역 장벽으로 인해 곤란해지자 중국 업체들은 EU로의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2021년 EU의 대중 무역 적자는 2084억달러(약 282조9655억원)였지만 2022년에는 2766억달러(약 375조5675억원)로 늘었다. 전기차 산업에 대한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에 나서는 것을 시작으로 재산업화를 국가적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프랑스 입장에서 중국의 공세는 부담스럽다. 중국 정부의 직간접적인 보조금 혜택을 받는 이들 제품의 유입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등 보호조치에 나서야 하지만 국가 간 입장 차이로 인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전통적인 세력권으로 여겨졌던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도 쇠퇴하고 있다. 민간 군사 기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가 지속되고 있으며, 경제력에 기반한 중국 기업의 진출도 이어지고 있다. 전력 생산의 70%를 원자력발전에 의존하는 프랑스로서는 아프리카로부터의 안정적인 우라늄 공급이 필요하지만 최근 벌어진 니제르의 쿠데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 지역은 점차 반프랑스 노선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동시에 친러 성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유럽과 그 역외 지역에서 프랑스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던 많은 조건이 불리해지고 있는 것이다.
'안보·제조업 독자 노선 확보' 주장에도 변화 쉽지 않아
최근 마크롱 대통령은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면서 유럽에 의한 독자적 안보 확보와 인공지능(AI)을 포함한 미래 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 강화, 자율성 및 독립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조금 지급을 포함한 각종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기술적 도약에 대한 적절한 제어장치를 EU 차원에서 확보해 미국 테크 기업의 시장 장악력 확대를 견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EU가 제도의 단순화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위주의 규정으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27개 회원국으로 이루어진 EU의 변화는 쉽지 않다. 미국과 유사한 유럽판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도입하여 첨단 제조업을 유치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다들 동의하지만, 여기에 소요되는 보조금은 어디에서 조달할 것인지, 그렇게 유치한 기업은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을 프랑스 혼자서 조정하고 해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5월 5일 프랑스를 찾았다. 중국 견제와 포위를 주장하며 동맹국의 동참을 요구하는 미국에 대해 프랑스가 미국의 의도를 거스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중국과의 협력을 통한 러시아 견제 같은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