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찾은 부산 사상구 덕포동. 삼락천을 따라 금형 공장과 신발 공장이 밀집한 좁은 길목엔 산업용 트럭이 드물게 드나들었지만, 각각의 공장 안은 저마다의 일로 분주했다. 일(一)자로 늘어선 생산 라인 한 개가 전부인 한 작은 공장에선 스니커즈 밑창을 붙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20~30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의 신진 브랜드가 디자인한 ‘발레 코어’ 스타일의 스니커즈가 작업자 10여 명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울 성수동에 수제화 장인의 공방이 모여있다면, 부산 사상구엔 기성품 신발의 제조 공장이 모여있다. 1960년대 고무신을 시작으로 나이키 운동화까지 부산에서 생산하게 되면서 이 지역은 수십 년간 신발 제조의 ‘메카’ 로 자리했다. 사상구 공장 지대에 ‘○○테크’ ‘○○실업’이라는 간판을 단 곳들이 바로 이런 공장이다.
이곳에서 신발 제조 산업의 ‘르네상스(부흥)’를 꿈꾸는 스타트업이 있다. 인공지능(AI) 기반 신발 제조 솔루션 ‘신플(SINPLE)’ 을 운영하는 크리스틴컴퍼니다. 신플은 부산의 제조 공장과 서울의 신발 브랜드를 연결해 주는 웹사이트 기반의 AI 솔루션이다. 그간 사람(브로커)에게 의존했던 일을 디지털로 전환했다. 솔루션에 디자인을 올리면 AI가 견적을 내주고 제조 단계별로 가동 가능한 최적의 공장을 찾아 연결한다.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1년 넘게 걸리던 것을 3개월로 단축했다. 브랜드에는 투명한 정보와 빠른 생산을, 공장에는 일거리를 제공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 지역 수출의 40%가 신발이었다.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스케쳐스 등 유명 브랜드 신발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다. 신발 공장 밀집 지역인 사상구는 당시 서울 강남 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19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이후 큰 공장들이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면서 쇠퇴했지만,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영세한 공장이 많다.” 크리스틴컴퍼니 창업자인 이민봉대표의 얘기다. 이 대표는 신발 자재상이었던 부모를 따라 신발 공장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신발 산업에 대한 깊은 애정을 타고난 그는 자신과 함께 자란 업계 2~3세들이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서울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라도 나서보자’면서 창업에 뛰어들었다. 그 역시 대학 졸업 후 유통, 게임, 통신 업계를 거쳤지만, 이 대표는 “결국 끝은 신발이었다”고 말했다. 아래는 이 대표와 일문일답.
이력이 화려하다. 신발 산업까지는 어떻게 이르게 됐나.
“첫 사업은 유통이었다. 대학 시절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매일 새벽시장에 가시더라. 모든 사장이 다 그랬다. 젊고 체력 좋은 내가 다 모아서 장을 봐주고 수수료를 받으면 돈이 될 것 같았다. 20여 곳을 대상으로 이 사업을 했고, 4년치 학비를 다 벌었다. 대학에서는 지역 특산품인 두부를 새벽배송하는 서비스를 창업했다. 반응이 좋았고 회사 매각에 성공했다. 대학 졸업 후엔 신발에 대한 애정 때문에 언젠간 신발 관련 창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낮엔 회사에 다니고 저녁엔 신발 도매시장에서 일을 배웠다. 증권사와 통신사에서 일하면서 솔루션에 눈을 떴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을 결합한 결과가 ‘신발 제조 산업의 디지털 전환’이었다.”
부산 신발 제조 산업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태광실업, 창신아이앤씨, 파크랜드 등 세계적인 업체들은 일찍이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겼다. 부산에 남아 있는 직원 300명 이상의 큰 업체는 20곳 안팎이다. 이런 업체는 5%뿐이고, 중견급이 10%, 나머지는 전부 영세한 업체다.”
그간 이 산업엔 어떤 불편이 있었나.
“가장 큰 불편은 신발 브랜드는 서울에, 공장은 부산에 몰려 있다는 점이었다. 신발은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밑창, 깔창, 봉제 등 10개 이상의 공장을 거쳐야 한다. 서울에 있는 브랜드가 각각 공정별로 제일 잘하는 공장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브랜드는 생산에 들어가려면 공장을 연결해 줄 브로커를 먼저 찾고, 브로커에게 정보와 권력이 쏠리게 됐다. 브랜드는 브로커가 통보하는 대로 비용을 내야 하고, 공장은 물량을 많이 받기 위해 브로커에게 로비해야 한다. 그러다 공장 한곳에 물량이 몰리면 생산이 밀리기도 한다.”
크리스틴컴퍼니는 이를 어떻게 해결했나.
“우선 브로커와 브랜드, 공장 간의 정보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두 발’을 해답으로 삼았다. 부산에 있는 공장을 전수 조사했다. 신발 공장인 것 같은 곳은 전부 찾아갔다. 그동안 뭘 만들어 왔는지, 뭘 잘하는지를 조사했고 업주에게 우리와 제휴를 맺자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고, 몇 시간을 문밖에 서서 기다린 적도 있다.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밤새 포장 일을 도운 적도 있다. 정성을 들이니 보답이 왔다. 이런 식으로 5년째 제휴 공장을 늘려가고 있고, 지금은 국내 1020개 신발 제조 공장 중 450곳(44%)이 우리와 제휴를 맺고 있다. 이제는 공장에서 먼저 제휴 제안이 온다. 이렇게 모인 정보는 플랫폼을 통해 브랜드에 투명하게 제공된다.”
신발 제조 솔루션 ‘신플’을 소개해 달라
“플랫폼을 통해 신발 생산을 지원하는 솔루션이다. 솔루션에 디자인을 업로드하면 AI가 이를 분석해 대략적인 견적을 내준다. 이후 디테일을 선택하면 세부 견적을 내주고, 각각의 공정을 가장 빠르게 수행할 수 있는 공장을 연결한다. 매칭이 적절하게 이뤄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플 팀이 직접 현장에 나가서 제조 현황을 검토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디자인도 지원한다. 브랜드가 좋아할 만한 시안을 AI가 먼저 제안하고 삼차원(3D) 디자인을 지원해, 1개월 만에 디자인을 끝낼 수 있게 했다. 기존의 디자인 과정을 보면 약 3개월 동안 트렌드를 수집한 뒤 디자이너가 직접 손으로 도안을 그려 공장에 샘플을 만들러 간다. 그런데 평면도로 보는 것과 실제 제품은 다르기 때문에 수정 작업을 5~6차례 거친다. 이 과정만 반년이 걸린다. 그사이 트렌드가 지나가면 출시되지 못하고 버려진다. 통상 디자인에 6개월, 생산에 8개월이 걸리는데, 신플을 활용하면 3개월 안에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마칠 수 있다.”
직접 운영하는 신발 브랜드 잘되고 있나.
“우리의 서비스를 테스트하려면 자체 브랜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크리스틴’을 출시하게 됐는데, 품질 관리를 직접 하다 보니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됐다. 크리스틴은 국내 패션 신발 브랜드 유일하게 롯데 에비뉴엘 명품관에 입점했고, 현재 더블유컨셉(W컨셉)과 함께 상품을 기획해 판매하고 있다. 남성용인 ‘크리스틴 옴므’는 올해 무신사에 입점한다.”
올해 목표는.
“해외 사업을 시작한다. 세계시장도 국내 시장과 비슷하다. 국내의 경우 브랜드는 서울에, 공장은 부산에 몰려 있는데, 세계시장은 브랜드는 미국에, 공장은 아시아에 쏠려 있다. 이들 브랜드도 생산을 준비할 때 브로커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지금 신플과 제휴를 맺은 아시아 공장은 50곳인데, 본격적으로 늘릴 예정이다. 글로벌 브랜드 영업을 위해 올해 초 미국에 법인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