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글로벌 핵심국 간 첨단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전환, 탄소 중립(net zero·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흡수량도 늘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늘어나지 않는 상태)으로 대표되는 녹색 전환, 경제 안보를 내세운 공급망 재구축 등 세계경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선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전선의 최전선엔 ‘표준’ 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호환성을 위해세계 각국이 약속하는 표준이 이제는 기술 우위를 지키기 위한 장벽 역할을 하고 있다. 첨단산업 표준 경쟁에서 밀리면 해당 분야에서의 기술 우위도 내주게 된다. 표준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美·中·日·EU, 표준 패권 경쟁 뛰어들다
2023년 5월 미국 정부는 기술 표준 주도권 확보가 필요한 통신, 반도체, AI 등 주요 8대 분야에 대한 ‘핵심 신기술 국가 표준 전략(US Government National Standards Strategy for 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ies)’을 발표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주도해 발표한 미국의 국가 표준 전략에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지가 대거 반영됐다. 백악관은 국가 표준 전략에서 “중국이 자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중국의 표준에 대한 타국의 지지를 유도 또는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동맹국 및 파트너와 함께 기술적 장점과 공정한 절차를 기반으로 국제 표준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중국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미국의 표준정책 발표 3개월 후인 2023년 8월, 중국은 ‘신산업 표준화 방안(China Standards 2035)’을 발표했다. 2035년까지 8대 신흥 산업과 9대 미래 산업 분야의 표준을 마련해 발표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일본은 같은 해 6월 범부처 과학기술 및 혁신 정책을 구체화한 통합혁신전략 추진 방안을 수립했다. 양자 기술, 통신, 반도체 등 첨단 분야 연구개발(R&D) 과정에서 국제 표준화 방안을 제시하도록 해 표준을 통한 기술의 상용화를 촉진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일본의 표준 전략은 그동안 ‘표준 수용 국가(rule taker)’의 위치에서 ‘표준 개발 국가(rule maker)’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EU는 이보다 앞선 2022년 3월 ‘EU 표준화 전략’을 수립하고, 첨단 기술 분야의 전략적 표준화 우선순위를 선정했다.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주요 국가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시기에 표준 전략을 발표한 까닭은 무엇일까. 진종욱 국가기술표준원 원장은 “R&D를 통해 확보한 자국의 기술 경쟁력을 국제 표준으로 삼아 기술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라며 “표준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패권 경쟁, AI 국제 표준 경쟁으로 이어져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세상의 변화도 빨라지고 있다. 2017년 디지털 기술 및 서비스 시장 규모는 1조달러(약 1372조원) 수준에 그쳤으나, 2026년에는 3조4000억달러(약 4665조1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AI 분야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AI 산업에 대한 표준 수립이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가 가입자 100만 명을 모으는 데 150일이 걸렸다. 인스타그램은 75일이 걸렸다. 하지만 챗GPT는 고작 5일이 걸렸다”라며 “이러한 급성장은 디지털 전환의 중요성과 함께 AI 개발을 위한 표준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 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3대 국제 표준화 기구도 “표준이 책임감 있고 안전하며 신뢰할 수 있는 AI 개발을 위한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것”이라며 AI에 대한 표준 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AI는 향후 가전, 모바일, 자동차 등 다양한 제품에서 활용될 전망이다. 최근 들어선 제품에 내장돼 클라우드 없이 작동하는 ‘온디바이스 AI’가 주목받고 있다. 이를 위한 AI 반도체의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AI 반도체가 AI 국제 표준이 없는 채로 개발될 경우, 수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조성환 ISO 회장은 “EU 등은 국제 표준을 기반으로 AI 규제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반도체 선진국인 한국이 반도체 패권을 AI 반도체 분야에서도 유지하려면 AI 국제 표준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녹색 전환·경제 안보 분야에서도 뜨거운 감자 된 ‘표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 전환 역시 표준 논의가 시급한 분야로 거론된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파리기후변화협정에 복귀했다. 국제사회의 탄소 중립 정책도 빨라지고 있다.
제품별 탄소 배출량 산정, 청정에너지 사용 확대, 제조‧운송 등 산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탄소 저감 등 탄소 중립 달성에도 다양한 국제 표준이 필요하다. 현재 93개국이 참여 중인 ISO 순환경제기술위원회를 중심으로 녹색 전환과 관련한 국제 표준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근 들어선 경제 안보 이슈 안에서 표준이 논의되고 있다. 자국 보호주의 무역 기조가 강해지면서, 주요국이 표준 협력을 동맹국이나 우방국의 지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연이어 국가 표준 전략을 발표한 것 역시 기술 패권을 상대국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국제 표준 경쟁이 치열해지는 지금 한국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한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계기로 글로벌 시장에서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2000년부터 국제 표준화 활동을 강화해 왔다. 2001년부터는 국가표준기본법에 따라 5년 단위로 국가 표준 기본 계획을 수립해 발표하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은 매년 국제 표준을 80여 건 제안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인 최초로 조성환 회장이 ISO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AI, 반도체 등 12개 첨단산업 분야에 대한 ‘국가 표준 전략’도 마련했다. 국가기술표준원과 한국표준협회는 5월 21일 열린 ‘첨단산업 표준 리더십 포럼 총회’에서 첨단산업 국가 표준화 전략을 발표했다.
정부 관계자는 “국가의 기술혁신과 기술의 세계시장 선점을 위한 산업 정책은 표준화 전략과 연동돼야 한다”면서 “디지털 전환과 녹색 전환은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래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표준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