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기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폐기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관련 기업 상당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텃밭 지역에 포진돼 있다. 유권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지지율이 떨어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단호하게 IRA를 폐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미 관계 전문 미국 싱크탱크 한미경제연구소(KEI)의 트로이 스탄가론 선임연구원 및 선임부장은 최근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연구소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인터뷰는 오는 11월 미국에서 차기 대통령 자리를 두고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이 펼쳐질 예정인 가운데 선거 결과에 따른 한국 경제 영향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관세 때문에 한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한미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바이든이 되면 좋을까.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게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의 생각이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지금보다 나빠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국 기업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푸른색 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나온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질문을 던질 때마다 거침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한미 관계에서도 무역과 경제정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그는 대선 이후 한국에 미칠 산업 분야별 영향에 대해 말할 때는 유독 힘주어 설명을 이어가기도 했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먼저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분야로 전기차를 꼽았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충전 인프라 보급을 막아 전기차 대중화가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은 인프라 투자와 일자리법(IIJA)을 기반으로 전기차 충전소를 더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인센티브를 줄여 충전소를 덜 짓도록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바이든 대통령의 IRA 시행 이후 전 세계적으로 많은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고, 생산 시설을 늘리고 있다” 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전기차 판매량이 하락하면서 미국에 투자한 기업들의 손해가 커지고, 투자가 중단되면서 생산 시설이 가동되지 않아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상당수의 생산 시설이 조지아주, 테네시주, 인디애나주 등 공화당 지지율이 높은 곳에 포진해 있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막상 IRA를 폐기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며 “공화당 입장에서도 지지율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무역 적자 ‘제로’에 초점 맞춰지면 韓 산업 직격탄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미국 대선 결과가 한국의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산업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수출 기반의 한국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 중 하나로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관세 10%를 부과하겠다고 했다”며 “이는 1970년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미국의 파트너 국가의 경제정책 변화를 꾀하기 위해 취한 정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관세가 한국을 특정해 부과하는 건 아니지만, 한미 관계에 있어서 미국의 무역 적자가 심해 관세를 통해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 할 것”이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관세를 높일 경우 마찰이 발생하면서 향후 한미 경제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 정책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에 당선될 경우 ‘미국 우선(America First)’ 정책에 따라 무역 적자를 해소할 다양한 수단을 동원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대표를 맡았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무역 장벽과 보호주의 정책을 강화하는 역할을 이끌었던 사람”이라며 “라이트하이저는 현재도 미국 무역정책에 주요한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2기’에서도 미·중 갈등 영향 피하기 어려울 듯
반면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된다면 친환경 에너지 확대 정책을 펼치며 IRA 체제가 더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IRA를 기반으로 한미 관계에 간헐적인 긴장감이 조성될 수는 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보다는 더 원활한 관계를 이어갈 것”이라며 “중국의 공급 과잉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 공급망 체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바이든 대통령 재선도 부정적인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현재 바이든 대통령은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의 심사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등 외국인 투자에 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중국과 관련 있는 기업이 미국에 투자할 경우에는 더 엄격하게 CFIUS 심사를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과 밀접한 관계의 한국 전기차·배터리 기업에 대한 투자 심사가 강화돼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선거 결과에 따라 미·중 갈등 관계 양상이 달리 전개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모색해 왔지만, 바이든 2기에서는 수출 통제와 규제를 더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산 대미 수출품에 최대 6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갈등이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은 미· 중 무역 분쟁의 영향을 줄일 수 있도록 미국과 중국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무역 관계를 다각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한국의 국방비 지출이 더 늘어 재정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신념 중 하나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군에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면서 “트럼프 2기가 열린다고 해도 기존의 핵심 가치관이 바뀔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트럼프, 양자 협정 선호”
스탄가론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양자 무역 관계를 중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국익 확대를 위한 양자 협정을 선호한다”며 “이 경우 미·중 갈등이 격화됐을 때 한국의 셈법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으로 재협상하는 등, 미국에 유리한 조건을 추구하며 양자 협정을 추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