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태평양 지역 내 미·중 패권 다툼의 거점으로 부상한 베트남에 4~5년 전부터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겼다. 베트남 법령이나 제도로 인해 피해를 봤다며 국제중재를 제기하는 해외 투자자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중재란 서로 다른 법과 제도를 가진 국가 간 상거래의 분쟁 당사자들이 중재인을 선임해 판정받는 절차다. 법원 판결과 달리 강제성은 없지만 일종의 계약으로 구속력이 있다. 주요 중재기관은 영국(LCIA), 미국(ICSID·ICDR), 프랑스(ICC), 싱가포르(SIAC), 홍콩(HKIAC)에 있다.

 2022년 말 중국 국유기업 자회사 2개가 ICSID에 베트남 정부를 상대로 투자 중재를 제기했다. 손해배상을 하라는 중국 기업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베트남 정부가 자칫 거액을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정부 대리인으로 해외 유수의 대형 로펌을 제치고 한국의 피터앤김이 낙점됐다. 국제 무대에서 벌어진 굵직한 국제중재 사건을 승소로 이끈 실적을 인정받은 것이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중재 불모지였던 한국의 위상이 180도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쾌거였다.

 국내 1세대 국제중재 변호사인 김갑유 대표가 2019년 설립한 피터앤김은 세계시장에서 초고속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설립 직후인 2020년 국제중재 전문 매체(GAR)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로펌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2021~2023년 30위 안에 안착했다. 2021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하 미래에셋)과 중국 안방보험 간 7조원대 국제 소송에서 미래에셋 승소를 이끌며 존재감을 알렸다. 외환은행을 인수했다가 판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46억8000만달러(약 6조4600억원) 규모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S)’에서 정부를 대리해 요구액의 20분의 1에 그치는 2억1650만달러(약 2988억원) 배상 판정을 이끌었다.

韓, 국제중재 동북아 최고 실력론스타 요구 거액 배상금 막아내영국 로펌 상대로 승리 거두기도

 피터앤김을 이끄는 30~40대 파트너 변호사 5명(신연수·윤석준·한민오·조아라·유은경)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국제중재 분야에서 한국이 동북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앞서있다고 자부했다. 

 신연수(사법연수원 37기) 파트너 변호사는 “국제 무대에서 케빈 김(김갑유 대표) 모르는 사람은 없다”라며 “영국처럼 국제중재 전통이 오래된 국가도 아닌데 한국은 10~20년 만에 실무가가 상당히 많아졌고 해외 중재기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조아라(40기) 파트너 변호사도 “한국 변호사들은 굳이 영미계 로펌에 들어가지 않고도 국제중재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독자적으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고 성공 경험들도 축적돼서 자신감을 갖고 사건에 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와 조 변호사는 미국 부동산 개발 업체 게일이 송도 개발 합작 파트너였던 포스코건설을 상대로 제기한 3조원대 국제중재에서 청구를 모두 기각시키고 중재 비용과 변호사 보수까지 모두 받아내는 완승을 2022년 거뒀다. 신 변호사는 서울대 서양학과에 진학했다가 공대 건축학으로 진로를 틀고 법대로 또 한 번 편입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현재 인수합병(M&A)과 주주 간 분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조 변호사는 김 대표, 윤석준(37기) 파트너 변호사와 론스타 사건 대리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 주주였던 미국 사모펀드 엘리엇에 1300억원을 지급하라고 한 ISDS 판정에 대해 정정 신청을 해 원금·이자 97억원을 감액받았다.

“국제중재 부담스러워하던 중소기업도 찾아와”

 최근 국제중재 사건의 무대가 되는 국가나 산업군이 점점 더 다양해지는 추세다. 윤 변호사는 “최근 중남미 관련 사건 문의가 들어오는데 기존에는 한국 회사가 진출한 숫자나 기업 규모에 비해 사건이 많지는 않았고,분쟁이 발생해도 현지 로펌을 써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갈수록 분쟁 규모도 커지고 현지 로펌만으로는 커버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한국 로펌에 문의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10여 년 전 국내 유통 대기업이 중국 현지 마트 체인을 인수한 뒤 부외부채(簿外負債·장래에 상환해야 할 부채가 있음에도 대차대조표상 부채로 표시하지 않은 것)를 예상해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낸 경력이 있다. 사고가 터진 뒤 사후에 수습한 게 아니라 예상해 돈을 번 특이한 사례다.

 과거 국제중재를 부담스럽게 여겼던 중소기업들도 피터앤김 문을 두드리고 있다. 분쟁을 무릅쓰더라도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서다. 중견 건설사 웅진개발 관계사인 ㈜매린은 지난 3월 중국 대기업을 상대로 한 국제중재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중동에서 못 받은 공사 대금 970만달러(약 134억원)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을 담당한 한민오(38기) 파트너 변호사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터지면서 자재 조달이 늦어져 공사 비용이 예상보다 늘어났던 사안”이라며 “영국 로펌을 상대로 예상보다 빨리 승소를 거둘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제중재가 활발하게 벌어지는 M&A는 재무적 투자자(FI)의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 복잡해지는 추세다. 신 변호사는 “합병의 개념으로 M&A를 하는 측과 FI는 마인드셋(mindset·사고방식)이 다르다”라며 “FI는 회사 가치를 높인 다음에 엑시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계약 구조가 다르고 거기서 비롯되는 분쟁 종류에도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과거에는 제값을 주고 M&A를 했는지를 가지고 다퉜다”면서 “이제는 투자로부터 4~5년 후 원하는 조건으로 엑시트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분쟁이 많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몰입할 수 있게 스토리텔링하는 게 핵심”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에게 외국어 능력만큼 중요한 역량으로 파트너 변호사들은 ‘스토리텔링 능력’을 꼽았다. 한 변호사는 “미래에셋·안방보험 사건 때 중국 기업이 15개 호텔을 팔면서 뒤에서 비밀스러운 이면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기승전결 구조로 빌드업해 재판부가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게 한 것이 결과에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래에셋은 2019년 9월 안방보험이 보유한 미국 호텔 15개를 58억달러(약 8조원)에 인수한 뒤 호텔 소유권 증서가 다른 곳으로 이전된 정황을 포착했다. 2021년 미국 델라웨어 대법원은 미래에셋 손을 들어줬고 회사 측은 계약금 7000억원과 소송 비용을 돌려받았다.

 재판부 설득에는 시각 자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천 영종도 에잇씨티 국제중재를 승소로 이끈 유은경(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는 “사업 시행자가 최소 자본금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인천경제청)이 계약을 해지한 건에서 조 단위인 전체 사업 규모에 비해 자본금 500억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것조차 못 가져오는 사업자에게 어떻게 사업을맡기겠냐는 취지로 변론했다”고 말했다. 에잇씨티 사업은 인천 영종도에 숫자 ‘8’ 모양의 인공 관광·레저 도시를 지으려던 것으로 계약이 해지된 사업 시행자가 인천경제청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