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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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현지시각)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이란 북쪽의 아제르바이잔 접경 지역의 댐 준공식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미사일과 공습을 교환하면서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초기에는 내·외부의 개입 등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 당국이 사고 원인을 기체 고장으로 발표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대통령이 타고 다니는 헬기가 노후화되었고 제대로 부품 수급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란에서 대통령은 ‘라흐바르’라고 불리는 최고 종교 지도자 다음의 권력 서열 2위에 해당한다. 최고 종교 지도자의 결정을 이행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관리하는 행정부 대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국가의 대통령과는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란의 대통령은 일정 부분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최고 종교 지도자와 일정 부분 갈등을 빚으며 제한된 범위 내에서 독자 노선을 걷기도 한다. 미국과 강경 대결 노선을 고수하는 최고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달리 미국과 핵 협상을 진행하였던 전임 대통령이었던 하산 로하니가 대표적이다. 라이시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따라 이란 그리고 중동 지역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 것인지를 놓고 많은 이가 궁금해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 뚫고 대통령 취임

라이시 대통령은 2021년 승리하여 4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란혁명 직후인 1981년 검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명성을 크게 얻게 된 것은 1988년 이뤄졌던 정치범 대규모 처형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큰 희생을 치르고 성과 없이 막을 내린 이란·이라크 전쟁에 따른 정치적 책임 논란을 돌리기 위해 이란 정부는 약 5000명에 이르는 정치범을 이라크 부역 혐의자로 몰아 5분간의 약식 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됐다. 1989년부터 최고 종교 지도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하메네이의 제자였던 라이시는 이후 2014년 법무부 장관을 역임, 201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시 현역이었던 로하니 대통령에게 패했다. 이란의 핵심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종교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었다. 4년 후 치러진 선거에서 2017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헌법수호위원회’를 통해 경쟁 상대가 될 만한 후보 대부분을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라이시는 선거에 승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합해놓은 듯한 헌법수호위원회는 모든 선출직 후보에 대한 사전 심사 권한이 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한 것이다. 당연히 국민 대다수는 이에 반발했고 당시 선거는 이란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 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 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갑작스러운 최고 지도자 후계 구도 변화

라이시 대통령은 재임 기간 미국과 협상을 통한 제재 완화 및 해제를 포기하고 중동 및 아시아 중심 전략을 전개했다. 이전의 로하니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대해 미국과 유럽에 구걸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하메네이의 입장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을 규합해 이스라엘 및 수니파가 주도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국가와 맞선다는 전략을 고수해 왔다.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이슬람혁명수비대 주도로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등을 활용해 왔는데 이에 대해 이란 외교부는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슬람혁명수비대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아미르 압돌라안을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해 적극적으로 이슬람혁명수비대 노선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부적 단결과 지지 기반을 확보한 라이시 대통령은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고, 중국과 경제적 관계도 강화했다. 또한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원유 수출량을 하루 40만 배럴에서 150만 배럴로 증가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 내부적으로는 연간 40% 수준에 달하는 인플레이션과 이에 따른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강압적으로 억누르면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은 이란 내부적으로는 최고 지도자 후계자 구도에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최고 종교 지도자인 하메네이의 경우 1939년생으로 고령에 따른 건강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계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종교계와 이슬람혁명수비대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아오던 라이시 대통령이 유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에 따라 이란 최고 지도자 후계 구도는 다시 불투명해졌다.

하메네이 둘째 아들, 후계 구도서 유리

2014년부터 하메네이의 건강상 문제로 인한 후계 구도가 논의되어 왔지만 10년째 모호한 상태를 유지한 배경에는 하메네이의 둘째 아들인 모즈타바의 존재가 있다. 1969년생으로 알려진 모즈타바는 공식 직책을 단 한 번도 맡지 않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정보기관을 총괄하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모즈타바를 하메네이는 후계자로 지명하고 싶어 했지만 권력 세습이 이슬람 혁명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내부적인 반발로 인해 모호한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해 모즈타바가 유리해졌다. 하지만 세습에 대한 이란 국민의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권력 구도는 당분간 계속 흐릿한 상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사망에 따라 이란 내부에 혼란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그런 모습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대외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지는 개혁주의 목소리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아오던 온건개혁파도 현재까지는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애도와 추모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만간 치러질 대통령 선거 국면을 통해 내부적 갈등이 다시 분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슬람 혁명 이후 45년이 경과하면서 혁명 세력은 권력 엘리트층이 됐고, 이슬람 정신은 국민을 탄압하는 수단이 된 상황에 대해 일반 국민의 불만도 많기 때문이다. 이란 내부적으로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는 복장을 하는 여성이 증가하고 있는 등 종교 원리주의에서 탈피한 세속주의 흐름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공권력을 동원한 탄압을 이어가고 있지만 선거 국면에서도 그러기에는 부담스럽기 때문에 선거 국면을 활용한 세속주의 및 개혁주의 세력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면서 권력 핵심과의 대결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사망이 변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지 아니면 엘리트의 지배력이 공고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