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툰데 눌(Stunde Null)’은 독일어로 ‘제로(zero) 시간’이라는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 직후를 말한다. 옛 질서는 사라졌지만, 아직 새 질서는 형성되지 않아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시기다. 기근과 추위가 심해 쾰른성당의 추기경이 신도에게 식량과 석탄을 훔쳐서라도 살아남으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독일을 이끌어야 했던 사람은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외교였다. 점령군이 독일의 산업과 국방, 경제, 정치체제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 총리는 총리와 외교 장관을 겸임하면서 독일이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프랑스에 공들여 국제사회 복귀
1951년 4월 11일 프랑스 파리에는 비가 조금씩 흩뿌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온은 10도를 밑돌았다. 아데나워 총리는 이날 전쟁 후 처음으로 프랑스를 찾았다. 그를 영접하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무 장관 슈망의 오른팔로 불리던 장 모네만 공항에서 그를 기다렸다. 독일의 국제사회 복귀에 대한 여론은 파리 날씨보다 더 냉랭했다. 이웃 나라인 프랑스부터 독일을 받아줘야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에 아데나워는 장관들을 이끌고 프랑스를 찾았다. 그는 재직 시절 총 26차례나 파리를 방문했다. 이런 노력으로 독일은 전후(戰後) 유럽 경제 협력의 기초가 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 정규 회원국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전후 세계 질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한 아데나워는 워싱턴 D.C.도 10번이나 방문했다.
아데나워는 이런 노력으로 군대 도입에도 성공했다. 전쟁 후 독일은 군사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연합군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국방력 없이는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방에 퍼진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군대 도입에 이용했다. 그는 유럽이 소련을 막아내려면 독일이 다시 무장해야 한다고 미국을 설득했다.아데나워는 친서방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면서 서방의 신뢰를 얻어 군대를 도입했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지위까지 얻었다.
사회적 시장경제로 라인강 기적 일궈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내 경제를 재건하는 일은 더 큰 과제였다. 식량과 에너지가 부족했고 전쟁 시기 통화 발행 여파로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다. 히틀러 시대의 통제경제가 무너진 후 어떤 경제체제를 도입할지를 두고 미국·영국·프랑스 군정청과 독일 내 정당이 대립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아데나워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되 경쟁 원칙과 사회적 책임을 부과한 새로운 제도였다. 이 제도는 독일에 경제 안정을 가져왔고 ‘라인강의 기적’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 1950년대 독일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두 배 이상 증가했고 1인당 생산량은 75% 이상 늘었다. 1950~6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9%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민간 소비는 연평균 7.8%, 민간 투자는 9.4%, 정부 지출은 8.0% 증가했다. 특히 수출은 연평균 13.5% 늘면서 민간 투자를 촉발했다.
반대 목소리에도 비전 안 굽힌 아데나워
아데나워의 정책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사회에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서방 정책은 진보 진영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군대 재무장은 국내외에 거센 논쟁을 불러왔다. 특히 소련이 ‘독일이 중립화를 선언하면 동서독 통합을 허용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이를 단호히 거부해 반민족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당시 “독일을 실험장으로 내놓지 않겠다. 힘을 키워 재통일한다”고 답했다. “전 독일이 평화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통일될 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대로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이 됐고 통일을 이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 ‘슈툰데 눌’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명확한 비전을 내걸고 힘 있게 독일을 이끌었던 아데나워 총리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