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사례만 봐도 충분하다. 실리콘밸리은행(SVB)과 FTX가 파산했다. 은행이나 가상자산 거래소 등 수탁 업체에 돈을 맡길 때 생기는 위험 부담을 온전히 해결할 방법은 없다. ‘내 돈의 통제권이 나에게 없다’ 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샤울로프(Michael Shaulov) 파이어블록스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가상자산 ‘셀프 커스터디’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셀프 커스터디란 가상자산을 거래소나 자산운용사에 맡기지 않고 개인 전자지갑에 보관해 스스로 직접 관리하는 걸 말한다. 샤울로프 CEO는 ‘개인과 기관을 막론하고 누구나 제삼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자산을 스스로 보관하기를 원한다’는 가정을 세운 뒤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기술을 도구 삼아 금융 자산의 통제권을 개별 주체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웹 3.0(블록체인 기반 탈중앙화 네트워크) 업계의 지향점을 그의 견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국내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파이어블록스는 샤울로프 CEO와 그의 동업자 이단 오프라트 최고제품책임자(CPO) 및 파벨 베렌골츠 최고기술책임자(CTO)가 2018년 함께 설립한 가상자산 관리 및 운영 플랫폼 개발사다. 기업 및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B2B 사업을 펼치는 이 회사의 플랫폼은 WaaS(Wallet as a Service· 서비스형 가상자산 지갑), 커스터디 기술, 디파이(DeFi·탈중앙 금융) 자금 관리, 토큰화, 가상자산 결제 등을 제공한다. 기관은 파이어블록스가 만든 기관용 전자지갑에 가상자산을 보관하고 다른 이와 주고받을 수 있다. 또한 증권·채권 등을 디지털 자산으로 변환하는 토큰화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1800개 이상 기업이 파이어블록스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중이며 파이어블록스가 생성한 전자지갑 수는 2억 좌를 웃돈다. 미국의 유명 은행인 뱅크오브뉴욕(BNY)멜런도 파이어블록스의 고객사 중 한 곳이다. 샤울로프 CEO는 “BNY멜런은 파이어블록스의 가상자산 지갑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며 “향후 BNY멜런이 파이어블록스 서비스를 이용해 고객에게 가상자산 중개 업무를 제공하는 서비스 확장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사들이 셀프 커스터디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묻자 샤울로프 CEO는 “가상자산을 다른 사업자에게 맡겼을 때 발생할 위험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BNY멜런 외에도 호주뉴질랜드은행(ANZ)과 브라질 최대 투자은행(IB)인 BTG팩추얼 등 유명 글로벌 금융사가 파이어블록스를 통해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암호화폐) 활용을 실험하는 중이다.
주요 금융사가 수많은 가상자산 관리 플랫폼 중 파이어블록스를 찾는 이유에 대해선 “가장 높은 완성도의 보안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샤울로프 CEO는 파이어블록스 창업 전 이스라엘 방첩 당국과 테크 기업 등에서 보안 관리 책임자로 일하는 등 보안 측면에서 특별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파이어블록스는 유일하게 다층(多層·멀티 레이어) 보안을 제대로 구현한다. 또한 파이어블록스 서비스는 네트워크와 하드웨어의 완벽한 분리를 구현해 이상 상황에서 해커의 접근을 원천 차단한다”고 말했다.
보안 측면의 우수함 덕에 파이어블록스는 국책 사업 파트너로도 채택됐다. 이스라엘 재무부는 지난해 텔아비브증권거래소(TASE)와 함께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국채 발행 연구 사업을 진행했다. 파이어블록스도 이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로 발행된 국채는 12개 은행이경매로 매입했고 블록체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산되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샤울로프 CEO는 “이스라엘 외에도 현재 두 국가와 공공 부문 프로젝트 논의를 나누고 있다” 고 귀띔했다.
그는 기업과 공공의 늘어나는 관심을 바탕으로 가상자산 셀프 커스터디 산업의 규모도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기준 글로벌 셀프 커스터디 시장이 4억달러(약 5480억원) 수준이다. 가상자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흐름을 고려했을 때, 5년 후 이 시장의 규모는 40억달러(약 5조4800억원)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파이어블록스는 올해 한국 시장에서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국내 게임 제작사인 위메이드는 파이어블록스를 통해 이미 지난해 6월부터 자체 발행 가상자산인 위믹스를 관리하고 있다. 국내 원화마켓 가상자산 거래소 중 한 곳도 파이어블록스 서비스를 이용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샤울로프 CEO는 한국 가상자산 시장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기술이 발달한 시장”이라고 평했다. 이어 “많은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 거점을 두고 영업하는 환경과 가상자산에 친숙한 한국인 특성 등,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다”라고 덧붙였다.
국내 가상자산 사업자 규제와 관련해서는 “파이어블록스는 서비스 제공 업체이기에 가상자산 사업자로서 직접 규제받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국내 금융 당국은 해외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강한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가상자산을 발행하거나 중개하려면 가상자산사업자(VASP)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금융위원회는 해외 사업자를 승인해 주지 않고 있다. 파이어블록스의 사업은 직접 가상자산을 중개하는 것이 아니며 가상자산 관리 서비스를 기업에 제공하는 것이기에, VASP 등록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게 샤울로프 CEO의 설명이다.
다만 그는 “이론적으론 파이어블록스가 현지 가상자산 사업자 규제를 받지 않지만 기업이 우리 서비스를 이용할 때 현지 규제를 준수하도록 플랫폼을 운영한다”고 부연했다. “고객사 수요에 맞춰 플랫폼에서 규제 준수 항목을 설정할 수 있어 예컨대 ‘자금 세탁을 막는다’나 ‘가상자산으로 도박을 못 하게 조치한다’ 등의 설정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샤울로프 CEO에게 향후 사업 목표를 묻자, 그는 “두 배 성장”이라고 답했다. 그는 “파이어블록스의 플랫폼을 거쳐 거래되는 가상자산이 연간 1조달러(약 1370조원)가량”이라며 “이른 시일 내에 이 수치가 두 배 정도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부터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도 집중 공략해 고객사도 두 배 정도 늘릴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장기적인 사업을 설명할 때도 두 배 성장을 언급했다. “파이어블록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사업에서 가상자산을 안전하고 간편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라며 “코인 관리 외에도 스테이블 코인을 사용한 결제, 비금융 자산의 토큰화 등 지금보다 파이어블록스 플랫폼의 활용처를 두 배로 늘리고자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