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멕시코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지 71년 만으로, 멕시코는 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보다도 먼저 여성 지도자를 맞이하게 됐다. 6월 2일(이하 현지시각)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가 동시에 치러진 이번 선거에는 총 1억3000만 명의 유권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집권 여당 국가재생운동(MORENA·모레나)당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Claudia Shein-baum)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상·하원 의원 628명 등 공직자 2만700명이 선출됐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상대 후보를 30%포인트 넘게 앞서, 1982년 선거 이후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승리했다. 의회도 집권 여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10월 1일 취임한다. 임기는 2030년까지다.

현 대통령 계보 잇는 좌파 정치인

셰인바움 당선인은 기후과학자다. 멕시코국립자치대(UNAM·우남대)에서 물리학과 공학을 배웠고, 1995년 미국에서 에너지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전문가로 참여했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의 정치 입문은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도왔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두 사람은 2000년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멕시코시티 시장 재임 시절 연을 맺게 됐다. 에너지 사용과 탄소 배출에 관한 12개 이상의 보고서를 쓴 그는 오브라도르 당시 시장에게 에너지 저감책에 대한 조언을 건넸고, 그는 셰인바움 당선인을 멕시코시티 환경국장으로 발탁했다. 이후 셰인바움 당선인은 2011년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모레나당 창당을 함께했다. 2018년엔 멕시코시티 최초의 여성 시장이 됐다.

6월 3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집권 여당 모레나당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 당선인이 선거에서 승리한 뒤 연설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6월 3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집권 여당 모레나당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 당선인이 선거에서 승리한 뒤 연설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셰인바움 당선인에게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정치적 멘토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임기 말인 현재도 60%가 넘는 지지율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에 대한 높은 지지가 셰인바움의 압도적인 승리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멕시코는 세계 가톨릭 인구 2위 국가인데, 유대인이라는 셰인바움의 종교적 배경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NYT가 그의 지인과 동료 24명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셰인바움 당선인은 자신의 성취를 드러내기보단 묵묵히 일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노벨상 공동 수상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보다는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했는지를 언급한다고 NYT는 전했다. NYT는 그를 “직원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강인한 상사”라고 평했다. 

'가톨릭' '마초 문화' 유리천장 뚫었다

멕시코는 문화적으로 남성 우월주의가 뿌리 깊고,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가톨릭 국가다. 이 때문에 셰인바움의 당선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번 대선은 여성 후보 2파전으로 치러져 화제를 모았다. 보수 성향의 야당 연합 세력의 소치틀 갈베즈 후보가 셰인바움과 맞붙었다. 그는 엔지니어이자 사업가로, 컴퓨터공학을 전공해 기술 기업을 창업했다.

2015년에 멕시코시티 미겔 이달고 구청장, 2018년에 상원의원으로 선출됐다. 보수 성향이지만 낙태권, 성소수자 권리 등 인권 문제에 대해선 진보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약 28%의 표를 얻었다. 

앞서 멕시코는 2018년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 성비가 동률을 기록했다. 상원의 경우 여성 의원이 남성 의원보다 많은 세계 유일한 국가가 되기도 했다. 2022년 멕시코 중앙은행(Banxico) 총재 빅토리아 로드리게스 세하가 최초의 여성 수장이 됐고, 지난해엔 노르마 루시아 피냐 에르난데스 대법관이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으로 선출됐다.

과제는 첩첩산중

셰인바움 당선인에게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해결하고 범죄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차기 미국 대통령과 이민자, 무역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부담도 떠안았다.

1 | 재정 적자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재정 긴축을 정부 기조로 삼았지만,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인프라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규모로 투입했다. 올해 멕시코의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5.9%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멕시코 재무부는 내년 적자를 절반(GDP의 3%)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세금 징수액을 늘리기 위해 탈세를 집중적으로 단속하겠다고 말했다. 국영 석유 회사 페멕스(PEMEX) 부채 문제도 심각하다. 페멕스는 세계에서 가장 빚이 많은 석유 회사로, 누적 부채는 1000억달러(약 138조900억원)가 넘는다. 반면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어 페멕스 구제를 위한 재정 지출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우려를 의식한 듯 셰인바움 당선인은 승리 확정 직후 로헬리오 라미레스 데라오 현 재무장관 유임을 발표했다. 셰인바움은 그에 대해 “재정 관리와 안정적 경제 발전 추진에 확신을 준 훌륭한 공직자”라며 “새 정부에서도 그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6월 3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조칼로 광장에서 모레나당 지지자들이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당선인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AFP연합
6월 3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조칼로 광장에서 모레나당 지지자들이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당선인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AFP연합

일각에선 그가 복지 지출을 늘리고 공공 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밝힌 만큼 세금 인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현 정부의 노인, 학생 대상 현금 복지와 농촌 보조금을 유지하는 등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추진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2 | 범죄와 전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오브라도르 대통령 집권기는 현대 멕시코 역사상 가장 유혈이 낭자한 기간이었다. 공식 집계된 수치에 따르면, 5년 6개월 동안 17만5000명이 넘게 살해됐고 약 4만3000명이 실종됐다.지난해 9월 선거 준비가 시작된 후 200명이 넘는 정치인과 공무원이 사망했으며, 6월 4일 멕시코 중부 미초아칸주 코티하 지역의첫 여성 시장 욜란다 산체스 피게로아 시장이 괴한의 총에 맞고 숨졌다. 셰인바움 당선인 승리 하루 만이었다.

코카인, 펜타닐 등 마약 관련 범죄는 수법이 점차 진화하고 있으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으나,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마약 밀매 업자와 정면충돌을 회피했다. 그의 유화적인 접근법은 야당으로부터 비판받았다. 셰인바움 역시 마약 카르텔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멕시코시티 시장 시절에 효과를 보였던 정책을 전국으로 확대 적용해 범죄를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3 | 미국과 관계

셰인바움 당선인은 2026년 미국·멕시코· 캐나다 무역협정(USMCA)을 유지할지, 수정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USMCA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2020년 7월 발효됐다. 

멕시코는 미국으로부터 국경선 지역 불법 이민과 마약 범죄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박도 받고 있다. 이 문제는 대선을 앞둔 미국 유권자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리스크는 더 커진다. 그는 앞서 재임 시절, 멕시코가 이민자의 미국행을 막지 않으면 멕시코 수출품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고, 당시 멕시코 정부는 불법 이민을 막으려 국경선에 수천 명의 인력을 배치했다.